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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3

숙녀에게 (피아노 연주)

변진섭이 원래 불렀었고, 유리상자도 리메이크해서 부른 적이 있는 “숙녀에게”를 피아노로 쳐봤습니다. 단아하고, 정갈하게 치려고 했는데 결과는 터치와 속도도 깔끔하지 못하고, 반주도 요란해지는 숙녀에게가 되어버렸습니다. 연주 악기는 야마하 클라비노바 CLP-270의 그랜드 피아노 1번입니다.

2008년 4월 25일 추가: 너무 빠르고 요란한 것 같아 다시 연주, 녹음했습니다. 그리고 페이지 내에 오브젝트로 삽입했던 것은 로딩 속도가 너무 느려져 빼버렸습니다.

숙녀에게 1.1 (피아노 연주) 원본 페이지

지금까지는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음악 파일에 대해서 외부 사이트로 링크만 걸었는데, 이번엔 페이지 안에 그냥 심어봤습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사용자는 윈도우즈 미디어 플레이어가, 다른 브라우저 사용자들은 표준 audio/mpeg 데이터 형식을 지원하는 미디어 재생기가 나올 것이고, HTML의 <object>를 인식하지 못하는 웹 표시 장치(user agent)에서는 (이론적으로) 원본 내려받기 링크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아예 object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에 대비해서 별도로 원본 페이지에 연결할 수 있는 링크를 하나 더 넣었습니다.

2008-04-03

뉴스 강박증

바쁜 현대인들, 특히 인터넷이 보편화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뉴스 중독이나 뉴스 강박증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나도 최근에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뉴스 또는 새로운 것, 또는 새로운 소식에 대한 심한 강박증에 걸린 것 같다. 사실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되고, 나의 역량과 지식과 지혜와 인격을 높여주는 원천은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부분 다 있다. 주변의 전문가들, 지인들, 친구들,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책, 또는 도서관이나 서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책, 기존에 북마크 해두었던 사이트, 기존에 다운로드 받아두었던 문서, 이미 구입한 음악 씨디(CD)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그런데도 쌓여있는 그런 수많은 자료들을 내가 과연 성의있게 끝까지 읽어본 것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인터넷 어딘가에 더 새로운, 더 적합한, 더 최신의, 더 놀랄만한 소식, 자료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새로운 자료를 찾아 인터넷을 검색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런 점을 상업적으로 잘 이용한 것이 바로 뉴스를 전달하는 미디어들이다. 어렸을 때에는 재미 없는 뉴스 프로그램을 보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어른들에게 뉴스는 최고의 오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텔레비전 뉴스를 몇 번 보지 않았다고 살아가는 데에 큰 지장은 없다. 세상 돌아가는 새로운 신문 기사를 보면서 얻을 수 있는 재미는 쌈박하지만 내가 가진 양질의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보다 결코 깊지 않다. 그것도 모자라 알에스에스(RSS) 구독기를 통해 내가 관심을 가진 분야의 블로그, 사이트, 뉴스, 비디오, 음악, 세상 돌아가는 경향 등은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이 엄청난 강박증은 사실 중독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하다.


단 며칠만이라도 텔레비전을 끄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과 담쌓아 보자. 단 며칠만이라도 알에스에스 구독기에 읽지 않은 기사가 쌓이도록 그냥 방치해보자. 짧은 기간이라도 새로운 음악, 새로운 영화, 새로운 소식에 둔감해보자. 대신에 책장 한 켠에서 사놓고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거나, 한 두 장 읽고 덮어둔 책을 펼쳐보자. 또 사놓고 들어보지 않은 먼지 얹힌 음악 씨디를 틀어보자. 기존에 받아놨던 방대한 문서를 오늘은 차분하게 읽어보자. 이미 내가 가진 엄청난 자원에 감사하며... 결코 부족함이 없는 만족감을 줄 것이라 믿으며...

2008-03-30

고향의 노래


민속촌의 한 집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권 안 되는 악보책 중에 세광 출판사에서 나온 "애창명가명곡집"이라는 노래책이 있습니다. 오래된 곡들이지만 아름다운 노래들이 많아서 요즘 몇 개를 골라 연습해보곤 합니다. 그 중에 작곡가 이수인의 "고향의 노래"는 고등학교 시절에 어느 여고 합창단이 부른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알게 된 곡입니다. 눈을 감고 노래를 들으면, 흰 눈이 덮인 평화로운 시골 마을과 저녁 노을이 떠오릅니다. 비록 그런 고향의 풍경은 간직하고 있지 않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있을 가장 평화롭고, 아늑한 곳으로의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에 이 노래를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고향의 노래 들어보기


고향의 노래 (김재호 시, 이수인 곡) 가사


1. 국화꽃 저버린 겨울 뜨락에
창 열면 하얗게 무서리 내리고
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녘-을 날아간다
아-- 이제는 한적한 빈 들에 서보라-
고향길 눈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고향길 눈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2. 달 가고 해 가면 별은 멀어도
산골짝 깊은 골 초가 마을에
봄이 오면 가지마다 꽃잔치 흥겨우리
아-- 이제는 손 모아 눈을- 감으라-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연주와 녹음


야마하 디지털 피아노 CLP-270의 기본 피아노에 리버브(reverb)를 좀 강하게 주어 연주한 것을 피아노 자체의 녹음 기능을 이용해 미디로 반주부 1절만 녹음하였습니다. 그것을 컴퓨터의 소나(Sonar) 6을 이용해 반주부 미디를 녹음하고, 이것을 복사해 2절 반주부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반주부에 다시 피아노에서 현(Strings) 음색을 이용해 1절과 2절 멜로디를 연주해 소나의 다른 트랙에 녹음하였습니다. 이제 소나를 틀어놓고 곰 녹음기를 이용해 웨이브(wav)로 녹음하였습니다. 다시 오데시티(Audacity)라는 오디오 편집 프로그램에서 웨이브 파일의 앞 뒤 공백을 잘라내고, 노말라이즈(normalize)한 다음에 최종적으로 MP3로 인코딩하고, MP3의 메타데이터는 리얼플레이어(RealPlayer)에서 수정하였습니다.

2008-03-12

청와대여, 기자들이여, 쑈를 하라!

청와대 압력으로 사라진 YTN 돌발영상 다시보기~조내 웃김!


2007년 최고의 동영상은 광운대 동영상, 2008년 최고의 동영상은 YTN 돌발 영상!
청와대 사람들, 광고 카피 잘 모르나봐요.
쇼를 하라! 쇼를 하면...
뒤. 집. 힌. 다!


이것과 관련된 논평도 한 번 읽어보십시오.

2008-02-24

17세기 네덜란드 명화로의 느린 여행: 진주 귀고리 소녀

진주 귀고리 소녀 책표지진주 귀고리 소녀 - 10점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서점에 들렀다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재미있어 보여 그냥 집어든 책,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를 읽었다. 네덜란드에는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고흐나 렘브란트와 같은 화가 뿐 아니라 이 미묘한 그림을 비롯해 단지 35편만의 작품을 남긴 요하네스 베르메르라는 화가가 있었다. 아름다운 파란색과 노란색 천으로 머리를 감싸고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한 눈이 큰 소녀를 그린 그의 이 그림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머리에 쓴 두건으로 보아서는 귀부인도 아니고, 진주 귀고리를 한 것으로 보아선 하녀도 아니며, 배경도 없이 까맣고 어두운 바탕에 왼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고 미스테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그림에 대해 슈발리에는 생명을 불어넣었다.


책 속에는 진주 귀고리 소녀를 비롯해 스물 세 점의 베르메르 그림이 들어있다. 음악은 아직도 나에게 삶의 일부로,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지만, 그림이나 회화는 사실 먼 나라 이야기로 남아 있었다. 게다가 디지털 카메라가 널리 보급된 요즈음엔 카메라 각도를 이리 잡아보고 저리 잡아가며 원하는 그림을 얻는 것이 베르메르처럼 지루하게 몇 개월에 걸쳐, 물감을 만들고, 모델의 위치를 바꿔가며 한 개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보단 훨씬 더 익숙한 일이다. 바로 그런 점이 이 책을 흥미롭게 만든 점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라는 작은 도시를 중심으로 한 화가와 모델, 그리고 그들 주변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하고 느린 감정의 변화가 생생하며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한 현시대의 독자로서 400년도 더 지난 유럽 작은 마을의 모습, 화가의 그림처럼 좀처럼 더디게 진행되는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투명 인간이 되어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대부분의 소설이 그렇듯이 초반 몇 페이지에서 배경을 설명하거나 등장 인물이 여럿 등장할 때 인물들의 이름이 헷깔리고 배경이 얼른 눈에 잡히지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주인공 그리트의 이야기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그래서 퇴근 후에 조금씩 시간을 내서 읽었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책을 다 읽고 덮기 전에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직 도둑과 아이들만 뛰는 법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그리트가 왜 아우더랑언데이크 가를 달려 내려올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고 신비한 진주 귀고리 소녀 그림에 담긴 비밀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마지막 부분에 저택의 큰 마님, 마리아 틴스가 한 말이, 누구에게도 설명하기 힘든 그리트의 삶을 인상적으로 묘사해준다.


그래, 인생이란 한바탕 연극과 같은 거야. 자네도 오래 살다 보면 놀랄 일 따위는 없을 걸세.

2008-02-14

슈퍼맨과 이현석

수퍼맨이었던 사나이 영화의 한 장면: 휘날리는 빨간 망토를 입고 지붕 위에 서있는 주인공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영화를 봤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작정을 하고 봤다기보단 무작정 영화관에 가서 시간이 되는 영화를 고른 결과였지요. 영화로서 그다지 박진감 넘치는 재미는 없었습니다만 나름대로 흥미로운 소재를 다룬 영화였습니다.


'슈퍼맨', 미국식 발음으로 '수퍼맨'은 남자 애들이면 한 번 쯤 꿈꾸어봤을 법한 영웅입니다. 어렸을 때 수퍼맨 시리즈를 참 재미있게 봤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또를 휘날리며 멋지게 하늘을 날고, 눈에서 광선이 나가고, 입에서 세찬 바람이 나가고,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쏜살같이 날아가 착한 일을 하는 수퍼맨! 이번 숭례문 화재에 수퍼맨이 날아왔더라면 하는 아쉬움까지 생깁니다. 수퍼맨과 같이 정의로우면서 힘센 사람을 우리는 갈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의 수퍼맨은 진짜가 아니었지요. 단지 자신이 수퍼맨이었다고 믿는 과대망상에 빠진 한 정신 장애인일 뿐입니다. 과대망상은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정신 질환의 증상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영화에서 다중 인격 등 현실적으로 찾아보기 어렵지만 보다 드라마틱한 이상 행동을 다루었다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현석은 과장되기는 했지만 꽤 그럴 듯한 인물입니다. 사실 그는 과대망상을 가졌지만 남에게 해를 끼칠만큼 위협적이지는 않습니다. 만약 우리 사회가 이렇게 고도로 문명화되지 않고, 사람들이 여유있게 원시적인 생활을 즐긴다면, 이런 사람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이웃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훨씬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며, 사람들의 이해 관계가 얽혀있습니다. 자동차나 전기와 같은 문명의 전리품들은 생활의 편의를 더해주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인한 사고의 위험도 커졌습니다. 이런 문명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격리되기 마련이지요. 주인공은 정신 병원에서 환자들을 다루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을 '하얀 악마'라고 칭했었지요. '하얀 악마'는 조금이라도 '정상적'이지 않는 사람들을 '이상적'이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치료'해야만 하얗고 깨끗한 세상이 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는 모습이 점점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깨끗이 치워야 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하거나, 또는 바꾸거나, 고치거나, 소독하거나, 때로는 박멸해야 합니다. 그렇게 치료받아 이현석으로 돌아온 '수퍼맨'은 과연 행복했을까요? 비록 허구이지만 자신이 수퍼맨이라는 믿음이 기쁨을 주고, 에너지를 준다면, 약물로 그의 에너지와 기쁨의 원천을 빼앗아가버리는 것이 반드시 옳은 일일까요? 혹시 우리는 그런 비정상적인 것,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되돌려야 깨끗해진다는 강박적인 집단 결벽증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요?


영화에서 남을 돕는 수퍼맨과 광인 이현석은 동일 인물입니다. 즉, 전적으로 악한 인물, 전적으로 선한 인물, 전적으로 이상한 사람, 전적으로 옳은 사람, 전적으로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나름대로 삶의 방식이 있고,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엄격한 잣대와 숨쉬기 힘든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 또는 다른 기준으로 바라봐야만 이해가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편,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기다리는 수퍼맨이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 좋은 사람의 모습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얀 악마'가 되어 마지막 남은 '광인'을 '계도'하려고 매달리지 않고, 조금 여유있게, 너그럽게 바라보면, 영화속 희정이(어린 아이)처럼 이현석과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008-01-27

영어를 왜 배워야 하는지부터

2MB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내놓는 정책들이 갈수록 가관이다. 특수목적고와 자립형 사립고등학교를 더 많이 세우게 되면, 초등학교부터 특목고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사교육이 늘어나고, 그런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일찌감치 경쟁의 뒷그늘에 방치한다는 좌절에 빠질 것이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대입 자율화를 명분으로 수능 등급제와 내신을 무력화시켜 그나마 공교육의 최소한의 존재 의미와 과도한 입시 경쟁의 견제 장치를 아예 없애버리고 있다. 그러더니 이제 2010년부터는 "영어 교육만 국가가 책임지고 해 줘도 (학부모들이) 가슴 펴고 살 것이다."라며 고교 영어 수업을 영어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영어 몰입 교육안은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과 효과성에 대해서 많은 전문가들이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더 큰 문제는 왜 정부가 이 시점에서 영어 교육을 못 시켜 안달이냐는 것이다. 영어 하나에만 수천억원을 쏟아부을 정도로 그것이 그렇게 국가적으로 중요한 과제였는가?


2MB의 영어 교육 강화 방안은 대기업과 재벌에게 모든 "규제를 풀어" 무한 자유를 주고, 농민들은 "떼쓰지 말고", 노동자들은 "자원봉사"하는 마음으로 죽도록 일만 하게 하여, "경제를 살리겠다"라는 그의 단순하고 맹목적인 구호의 연장선에 있다. 그가 영어 공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말에 신뢰가 가지 않는 것도 그 이유다. 그는 영어가 아직 우리 사회의 주요 출세 수단, 경쟁 도구로서 원하는 만큼의 큰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온 사회를 영어 광풍에 몰아넣어 모든 사람들이 죽기로 영어에 매달리게 하고 싶은 거다. 그게 바로 그가 꿈꾸는 "자율적인" 무한 경쟁 사회이니까. 그런 경쟁 사회에서 제일의 생존 도구로 떠오른 영어는 많은 사람들의 꿈속에 나타나며 괴롭게 할 것이다. 학생과 교사들은 요구하는 영어 수업을 못 따라가면 학원으로 학원으로 몰릴 것이고 결국 청소년기에 성장하면서 습득해야 하는 올바른 가치관과 인성 형성 교육은 뒷전으로 밀릴 것이다.


영어를 왜 배우는가? 우리 나라 영어 교육의 큰 문제점은, 영어를 왜 배우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고 무조건 조금이라도 일찍, 조금이라도 더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생을 살아가는데 지금처럼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배운 영어를 쓸 일이 얼마나 될까? 그 시간에 수학, 과학, 철학, 문학, 예술을 공부했으면 우리 나라의 과학 기술과 문화 예술이 더 성숙해있지 않을까? 모든 대한민국 사람이 죽기살기로 매달려 다 영어를 잘 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영어를 배우는가? 혹시 우리보다 잘나 보이는 "미국"이나 다른 영어권 서구 국가들을 닮고 싶어서는 아닐까? 그것이 한참 잘못된 것이다.


내가 영어를 공부하는 목적은, 서로 다른 전통과 문화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다양한 사람들이란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세계에는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기 위해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보통은 중간 언어인 영어를 많이 사용한다. 이렇게 세상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우리말과 우리 문화가 소중한 만큼 그들의 말과 문화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 영어는 하나의 도구이다. 이것이 진정한 세계화 교육이다. 우선 우리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런 정체성을 바탕으로 세계 문화의 다양성을 배척하지 않고 이해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지평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넓히는 것. 맹목적으로 현재 영어를 못하니까, 또는 미국 사람들이 쓰는 것이니까 국가가 "올인"해서라도 모든 사람을 미국 사람처럼 만들겠다는 발상에 동의할 수 없다.


2MB의 영어 교육 방안은 한 특목고 교장이 자기 학교 선전용으로 내놓을 만한 것이지 결코 국가의 교육 정책을 책임지는 대통령이 내놓을 만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공교육은 맹목적으로 "영어 못하니까 국가가 나서서 영어 교육 시켜주면 되겠네!"식의 단순한 성장 처방이 아니다. 보다 성숙한 국가로 가기 위해 할 일이 얼마나 만을텐데, 20세기 초에나 나올법한 "대운하"를 파자고 하질 않나, 갑자기 고등학생들 영어 회화 잘 하게 해주겠다고 하질 않나, 정말 한숨만 나온다.

2008-01-15

삼청대학교 교육대! 경청의 중요성

퇴근 버스 안에서 영화 "만남의 광장"을 틀어줘서 잠깐 보았다. 삼청교육대에서 탈출한 임창정이 어느 시골 마을의 선생님으로 순식간에 변하는 순간을 보았다. 내 주변에서 흔히 생기는 커뮤니케이션의 오류이다. 남의 말을 끝까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듣지 않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류가 생긴다. 유독 그런 사람들이 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다 안다는 듯이 중간에 싹뚝 잘라버리는 사람들. 문제는 말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완전히 화자의 의도를 오해하고 있는데, 그 이후에는 듣는 사람 마음대로 상상까지 덧붙여서 복구 불능의 상태로 넘겨짚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매우 피곤하다. 그 이후에는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이 이미 잘못 생성한 틀에 맞추어서 끼워넣어버리므로 사실상 진지하고 깊은 대화가 안 된다.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 횡행하고, 권위주의가 강한 사회나 조직에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상사는 이런 방식으로 대화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한편으로 이런 사람은 속이기도 쉽다. 앞에 몇 단어만 키워드로 던지면, 뒤에 서술어는 듣기도 전에 마음대로 들은 단어를 조합해 자신만의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키워드 몇 개를 던지면, 그 사람은 절대 더 이상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조합한 단어를 내가 말한 것처럼 재단해버린다. 임창정을 선생님이라고 단정한 임현식에게 임창정이 선생님이 아니라는 몇 번의 암시를 주어도 다 무시해버리는 것처럼.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은 정말 중요한 사회적인 기술이고 매우 달성하기 어려운, 훌륭한 인간의 덕목이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말을 자르게 된다. 그리고 말을 건성으로 듣게 된다. "삼청대학교 교육대"라는 놀라운 사실을 가공해낸 마을 이장 임현식을 보고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영화에서는 웃기는 장면이지만, 일상 생활에서 이런 오류로 인해 대화가 되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해보면 정말 속이 답답해진다. 한 박자만 천천히, 상대방의 말을 다 듣고, 자기의 말을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