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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3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 장편 소설)

몇 달 전부터 알뜰 통신사의 요금제로 바꾼 후에 전자책 구독 서비스인 '밀리의 서재'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어서, 재미있는 책들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도서관 전자책 서비스도 좋지만, 없는 책이 많아서, 좀 아쉬웠습니다. 밀리의 서재에서 최근에 읽은 책들은, EBS 다큐멘터리 자본주의,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등이 있습니다. 읽은 기록들을 살펴보니, 대략 두 권의 비소설을 읽는 동안,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을 한 권 정도 읽었던 것 같습니다. 

밀리의 서재에서 읽어볼 책들을 찾아 헤매다 우연하게 발견한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이라는 작품을 접했습니다. 작가 이름이 차인표입니다. 맞습니다. 유명한 배우, 차인표씨입니다. 저는 배우 차인표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소위 바른 생활 사나이라고 알려졌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책 표지가 참 아름답고, 제목이 조금 낭만적(?)입니다. 마치 헤르만 헤세의 한 작품이나 황순원의 소나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 저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책표지가 아름답습니다.


1931년 일제 강점기, 백두산 기슭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저는 대략 20여년 전에 회사 사람들과 함께 중국을 통해 백두산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 때 보았던 신비한 느낌이 영롱한 문장으로 정말 잘 그려져 있습니다. 

천둥소리를 내며 하얀 물을 쏟아 내는 폭포 위를 날아 우산대처럼 하늘로 길게 뻗은 이깔나무 숲을 지나니, 끝없이 펼쳐진 노란 들꽃밭이 나타납니다. ... 억새밭이 끝나는 그곳에 작은 언덕이 봉긋 솟아있네요. 

백두산 자락에서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끼 제비의 시각으로 하늘에서 마을 사람들의 삶을 바라봅니다. 이야기를 구수하고, 따뜻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호랑이 마을의 촌장님 댁, 너른 억새밭, 잘가요 언덕의 꿀밤나무가 눈에 선하게 잡힙니다. 그리고 '오세요 종' 소리가 "땡~ 땡~" 멀리서 들리며, 때로는 차가운 백두산 안개 속에서 미세한 호랑이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4D 영화관에 온 것처럼 말이죠.

작가는 1997년 한국에 오셨던 훈 할머니를 보고, 그 형편없는 시절을 버텨 낸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무려 10년에 걸쳐서 원고를 붙잡고서, 백두산을 직접 탐방하고, 사실을 검증하며,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이 살고 계시는 '나눔의 집'에 가보고, 다듬고 또 다듬어 세상에 선보인 작품입니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시대였지만, 백두산의 천지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우리 나라와 일본 젊은이들이 무도한 시대에 맞서 서툰 사랑을 지켜내려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호랑이 마을의 순이를 비롯한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물건처럼'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파렴치한 죄를 널리 알리고 죄인들을 응징하겠다는 작가의 첫 마음은,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뀌어갑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해자들이 진정한 반성과 사과, 용서를 구함으로써, 할머니들과 그들 사이에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라고요.  

잔인하고, 아프고, 시린 이야기를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들에 담아서 선사해준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2024-03-22

『박태웅의 AI 강의』를 읽어보았습니다.

『눈 떠보니 선진국』을 읽고 나서 같은 작가가 쓴 『박태웅의 AI 강의』도 꼭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생성형 AI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학원에서 신경망 배울 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팠어야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는 소위 인공지능의 겨울이었던 시기여서, 인공지능이 이렇게 느닷없이 성능이 좋아지고, 능력을 갖추게 되리라고 예상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박태웅의 AI 강의. 박태웅 지음. 한빛비즈.
박태웅의 AI 강의



서점에 가보아도, 챗GPT에 대한 책들이 넘쳐납니다. 많은 책들이 이것을 어떻게 잘 활용하여, 나의 업무 생산성을 극적으로 높일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좀 더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그럴듯한 콘텐츠를 빠르게 만들어서 인터넷 세상을 오염시키는 방법에 대한 글과 영상들은 이미 넘쳐납니다. 

그런 와중에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 더 나아가 인공일반지능(AGI)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거시적인 영향과 파급 효과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보고, 이면에 숨어있는 위험을 인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보는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박태웅의 AI 강의』는 이해하기 쉽게 쓰여져 있지만,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전체 다섯 개의 장(1강~5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저는 3강, 열려버린 판도라의 상자였다고 느꼈습니다. 오픈AI의 샘 알트먼은 "인공일반지능이 만약에 고장나면 무엇인가 다른 조치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특정 회사가 이런 AI를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지만, 정작 요즘 오픈AI의 행보는 갈수록 "클로즈드" AI로 향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 설명할 수 없는 요즘의 AI는 원하지 않는 결과(편향되었거나, 차별적이거나, 허위이거나, 개인 정보를 침해하거나 등)가 나왔을 때, 그것을 고치는 방법도 근본적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스카이넷이 인간을 공격하게 되는 상황까지는 상상하지 않더라도, 현재의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인해 판도라의 상자가 이미 열렸고, 이것에 대해 전사회적으로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어떤 미래가 올 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소셜 미디어(인스타그램)를 사용하는 정도와 미국 소녀들의 자살률 증가가 높은 상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메타의 과학자들은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에 의해 우리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과 에코 체임버(echo chamber)에 빠져 있을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정치적인 극단주의가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거대 기업에 의해 움직이는 소셜 미디어의 부작용에도 우리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생성형 인공지능의 부작용에 대해 지금부터 고민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2020년 구글에서 인공지능 윤리를 연구하다 해고당한 팀닛 게브루(Timnit Gebru)가 쓴 논문, <확률적 앵무새의 위험에 대하여: 언어 모델은 너무 커져도 좋을까?>에서 지적한 네 가지 위험성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개리 마커스도 비슷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첫째, 거대 언어 모델을 운영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재정적 비용과, 매우 많은 양의 전기, 탄소, 물이 소비됩니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에 가장 크게 타격을 줍니다.

둘째, 이 언어 모델 안에 어떤 편견과 왜곡이 들어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모델에는 인터넷에서 영향력이 작은 국가와 민족의 내용은 누락되고, 부유한 국가의 관행은 더 많이 반영되어 모델이 생성한 답이 동질화될 수 있습니다. 

셋째, 연구의 기회 비용입니다. 그럴 듯한 답을 내놓는 거대 언어 모델에 대부분의 연구비가 집중되어, 더 필수적이고 중요한 과제에 자원과 예산이 배분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잘 알려진 환각(hallucination)의 문제입니다.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허위 정보, 가짜 뉴스, 딥 페이크를 구분하고,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뚜렷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 책에서는 오리지널의 실종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를 기반으로 그럴듯하게 생성된 이미지들이 인터넷 세상을 도배하고, 인공지능이 생성한 그럴듯한 글들이 꽉차게 되면, 이제 인공지능은 더 이상 학습할 오리지널 데이터가 부족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인공지능의 성능은 점점 더 나빠진다고 합니다. 인터넷 세상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콘텐츠가 넘쳐나는 열린 세상이 아니라, 유사한 이미지와 자가 복사된 글들로 채워지는 닫힌 세계, 근친 교배로 다양성이 상실되는 세계가 될지도 모릅니다. 

여섯 번째, 차별의 재생산입니다. 논란이 되어 폐기되었던 아마존의 인공지능 채용 시스템, 골드만 삭스의 인공지능 신용평가 시스템, 컴퓨터 비전의 발전에 혁혁한 기여를 하고 있는 이미지넷 등이 예로 언급되었습니다. 이런 시스템에 내재한 성차별, 인종차별, 기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차별적 패턴을 인공지능이 학습하여 차별은 확산되고 재생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럽 연합은 2019년 「신뢰할 수 있는 인공지능 가이드라인」을 만들었고, 미국은 「알고리듬 책무법안 2022」, 우리 나라는 「AI(인공지능)산업 육성 및 신뢰 기반 조성에 관한 법률」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뢰할 수 있고, 위험하지 않은 인공지능을 위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지혜를 모아서 사회적인 합의와 대책을 잘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2024-03-14

Think Again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본 것들

와튼 스쿨의 조직심리학 교수인 애덤 그랜트(Adam Grant)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저자이다. 그의 책 『오리지널스』를 읽고 느꼈던 충격과 감동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쓴 다른 책들도 모두 읽어보아야 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오래되었다. 최근에 나온 『기브앤테이크』나 『히든 포텐셜』을  읽어보기 전에, 먼저 나왔던 『싱크 어게인』을 읽어보았다. 

싱크 어게인: 다시 생각하기의 힘. 애덤 그랜트 지음. 이경식 번역
싱크 어게인: 다시 생각하기의 힘. 애덤 그랜트 지음. 이경식 번역

역시 풍부한 생각할 거리들을 제공해주었고,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믿음, 선입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무엇이 실수였을까 회상해보게 되었다. 

네 가지 마인드셋이 나온다. 

앞으로 내 믿음이 위험해질 때 과도한 설교에 의존하는 '①전도사'나, 남의 잘못만 따지고 드는 '②검사', 상대를 설득해서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정치 공작에 뛰어드는 '③정치인'의 방식으로는 내 자신의 업데이트와 상대방이 있는 설득, 협상, 토론, 논쟁의 현장에서도 잘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의심해보며, 새로운 사실과 데이터를 접할 때마다 기존의 믿음을 수정하고 업데이트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④과학자'의 마인드를 갖추어야 한다. 

책을 읽으면서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믿음 체계 또는 행동 양식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들이 있다. 그 중에는 후회스러운 지나간 일들도 있고, 앞으로는 다르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은 것들도 있다.

첫째, 나의 전공과 나의 적성, 흥미를 한 곳에 가두고, 다시 생각하기에 실패했다. 나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인지심리학(조금 좁혀서 말하면, 지각심리학)을 공부했다. 그런 선택을 한 배후에는, 인간을 과도하게 "자연 과학"의 연구 대상으로 바라본 나의 편협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좀 더 "부드러운" 과학이랄 수 있는 인문학, 사회학, 상담 심리학, 사회 심리학에 대해서마저 눈과 귀를 상당히 닫아버렸다. 옳고 그름이 흑백 논리로 규정되지 않는 인문학적 사고의 깊이와 그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것은 한참 나이가 든 이후였다. 

둘째, 첫 번째 언급했던 전공의 연장선에서, 나의 커리어를 발전시켜 나감에 있어서, 다시 생각하기를 통한 확산과 수렴을 적절하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직장 생활 초창기에 흥미를 가지고 더 발전시켜나가고 싶은 나의 전문성은 "온라인 교육", 소위 말하는 "이러닝"이었다. 그런데, 나의 정체성을 그것과 동일시한 나머지 일종의 몰입의 상승 효과(escalation of commitment)를 통한 터널 시야(tunnel vision)에 빠졌던 것 같다. 회사에서 나의 커리어를 수평 확장할 기회(예를 들면, 회사의 중장기 경영 전략 수립, 변화 관리 에이전트 등)에 소극적으로, 또는 자신감 없이 임하게 되었다. "이러닝"은 나중에 "디지털 러닝", "소셜 러닝", 관련된 "웹 접근성 기술" 등으로 조금씩 변형되어 갔지만, 큰 틀에서 나는 다시 생각하기를 통한 변화를 이루지 못했다. 

커리어와 관련되어 아이에게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라는 어리석은 질문도 이제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이는 아직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시시각각 변해가는 사회와, 또 본인의 흥미, 관심, 목표가 계속 바뀔 것이고, 서서히 발견해나갈 것이다. 인공지능이 직업의 세계를 앞으로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알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벌써부터 "나는 무엇이 될거야"라고 단정하며, 다른 가능성의 세계를 닫아버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무엇이 "되는 것"은 궁극의 목표가 아니다. 변화에 적응하며, 끊임없이 다시 생각하고, 다시 업데이트하며 행동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

세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직장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이다. 초급 리더가 되었을 때, 나는 그동안 봐왔던 선배 리더들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과도하게 쏟았다. 그런데 그것이 "착한" 리더가 되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또, 나의 생각에 대해 비판적으로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을 적절한 도전 네트워크(challenge network)로 온전히 활용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의식적으로는 열린 마음과 겸손함을 갖추려고 계속 다짐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의 행동과 결정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을 나의 정체성에 대한 비난으로 판단하고, 더 마음을 닫아버렸던 것은 아닌가 하고 후회한다.

네 번째,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다. 나는 정치적인 성향은 비교적 뚜렷했다. 그런 시각으로 다른 한 쪽 정치 집단을 바라보면 상대방은 "바보 멍청이" 아니면, "악마" 둘 중의 하나로 보인다. 어떤 한 사람을 "악마"로 규정하면,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은 악한 행동이 되고, 좋아 보이는 행동의 기저에도 "저의"나 다른 "음모"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일말의 협상과 타협과 토론의 가능성도 닫혀 버린다. 물론 이런 시각을 나의 일상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편향이 일상에서도 조금씩 베어나왔고, 그런 이유로 주변 사람들을 정상적인 "대화"의 상대로 잘 인정하지 않았던 속내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책에서는 협상과 설득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내용이 할애되어 있다.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은 협상과 설득에서도 상대방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 최근, 점점 더 물러설 수 없는 전면전으로 가고 있는 의사 집단과 정부의 갈등을 바라보며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양쪽 모두 상대방을 협상 가능한 파트너로 바라보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노선의 선명성과 극단성이 상대방을 포기하게 하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노련하고, 유연한 파트너라면, 사안을 단선적으로 보지 말고, "복잡성"을 인정하고, 파고들며, 그 안에서 솔루션을 함께 찾아야 한다. 

최근에 어떤 필요에 의해서, 내가 과거에 끔찍하게 싫어했던, 회계학과 법률 관련 책을 보고 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 과목인데, 내가 좋아하는 과목보다, 이 두 개의 과목에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렇게 싫어하던 영역에도, 깊이있는 "논리"가 있고, 인간 삶을 반영한 "복잡한" 체계가 있으며, 그것을 발견해가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 물론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에서 말하듯이 이제 출발점에서 쪼~끔 맛을 본 무식한 사람이 많이 아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려고 의식적으로 신경을 쓴다. 

독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즐거움을 준다. 하나는,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믿음 체계를 더 강화해주고, "그럼 그렇지"하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을 강화해주는 즐거움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내 생각이 좁았거나, 틀렸거나, 대폭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즐거움이 없다면, 독서를 할 필요가 없다. 이제 50이 넘어서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앞으로 기존의 믿음을 계속 업데이트할 수 있는 두 번째 즐거움을 주는 독서를 계속 해나가고 싶다.

2024-02-13

『아픔이 길이 되려면』 아픔에서 배워야 하는데

2022년 10월 29일 서울 도심 번화가인 이태원에서 159명이 목숨을 잃은 믿을 수 없는 참사가 일어났다. 2014년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의 기억이 아직 서늘하게 남아있는 상태에서 다시 한 번 큰 충격과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현재도 끝나지 않은 진행형이다. 대통령은 끝내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재발 방지를 하자는 특별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아픔이 길이 되려면: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2017년에 나온 책이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 재난, 쌍용자동차 대량 해고 사건, 이민자나 성 소수자가 겪는 차별과 건강,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이황화탄소 중독 사건, HIV 감염자에 대한 차별, 총기 규제와 살인 사건 빈도, 가습기 살균제 사건, 삼성반도체 "클린룸"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동자, 1995년 시카고 폭염으로 사망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두 일정 정도 사회적인 원인으로 인해 개인의 건강과 생명이 위협받았던 사례들이다. 한 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신체와 정신건강의 위협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매우 컸고 일관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저자의 주장이 아니라 데이터로 모두 뒷받침되어 보여주었다. 

김승섭 교수는 사회역학자이다. 한 개인의 건강, 질병과 그 사회의 여러 가지 요인들의 관계를 찾아서 밝혀내는 역할을 한다. 기존의 의학이 개인을 둘러싼 생리학적 원인과 임상 데이터로 설명하거나 치료하지 못하는 부분의 질병과 심리적인 고통에 대해 사회환경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명력을 더해주는 것이 사회역학이다.

책에 따르면, 사회적 안전망과 패자부활 기회가 빈약한 상태에서 고용 불안과 해고가 개인의 건강에 큰 악영향을 준다고 한다. 이렇게 개인이 사회적 도움의 손길이 부족한 상태에서 경제적 위기를 겪을 때, 결국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연결될 수 밖에 없다. 불행히도 최근(2020년)까지도 우리 나라의 인구 10만명당 자살율은 24.1명으로 OECD 국가 중에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자살율이 급격히 증가한 시기도 IMF 구제 금융, 카드 대란, 글로벌 금융 위기와 같이 경제 위기와 연결되어 있다. 사회경제적인 위기에 취약한 개인들이 극단으로 내몰리며,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또 죽음으로 연결된다면, 그 개인으로서도, 그리고 우리 사회로서도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다. 

아픔을 겪은 개인에 대해 이웃과 사회는 어떻게 이해하고, 공감을 하고,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겪었던 상처와 아픔이 개인마다 다 다르고, 그것을 단순한 보상, 몇 번의 심리 치료를 제공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는 있을까? 그들의 아픔을 공감해주고, 비를 피할 수 있는 우산을 줄 수 없다면, 같이 비를 맞아주는 것이 건강한 사회가 해야 할 일이라는 김승섭 교수의 글에 밑줄을 긋는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가 지혜롭지 못해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원인으로 인해 생긴 아픔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그 아픔으로부터 새로운 길을 만들고,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과연 우리는 아프지 않고 건강한 사회를 위한 새로운 길을 잘 만들고 있는 것일까? 저자와 같은 분이 우리 사회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고 감사할 따름이다.

2024-01-23

눈 떠보니 선진국? 후진국?

예전에 LG전자와 현대자동차에 다닐 때에 해외 현지채용인 대상 교육 업무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본사가 있는 우리 나라로 오기도 하면서 많은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보았습니다.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대한민국에 뿌리를 둔 회사, 즉 우리 나라에 본사가 있으니, 현지채용인들은 본사를 특수하게 바라봅니다. 즉, 본사의 방침, 정책, 비즈니스 프랙티스가 기준이 되며, 해외에도 이를 적용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 때마다 몇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 본사가 있는 우리 나라에서 만든 정책과 규칙이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할 수 있는가?
  • 우리 나라의 비즈니스 프랙티스는 다른 나라가 부러워하고, 참고할만한 것인가?

우리 나라의 비즈니스 방식을 매우 존경스럽게(?) 바라보며 어떻게든 배우려고 애를 쓰던 나라로 중국과 인도가 떠오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본사에서는 이렇게 해결했다는 사례가 마치 최고의 솔루션인 것처럼, 중국과 인도 직원들은 열심히 필기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반면에 소위 말하는 서양(북미와 유럽)의 직원들은 대체적으로 본사의 교육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달랐습니다. 저는 본사의 프리미엄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났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개발도상국에서 전 세계에 통하는 스토리를 어떻게 만들어낼지 항상 고민이었습니다. 


눈 떠보니 선진국. 앞으로 나아갈 대한민국을 위한 제언. 박태웅 지음.
눈 떠보니 선진국. 앞으로 나아갈 대한민국을 위한 제언. 박태웅 지음.

2021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대한민국을 List A(개도국)에서 List B(선진국)로 지위를 변경했습니다. 유엔무역개발회의가 설립된 이래 최초로 지위 변경이 된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합니다. 그 밖의 여러 가지 지표로 보아도, 대한민국을 선진국이라고 분류해도 무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눈 떠보니 어느덧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박태웅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의 『눈 떠보니 선진국』은 이렇게 급격하게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한 대한민국이 건너뛴 근대화의 몇 가지 요소들을 짚어주고 있습니다. 압축 성장하며 급격하게 선진국의 요소들을 갖추게 된 우리 나라가 이제는 건너뛴 근대화 과정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 성찰하고 있습니다. 

2021년 8월, 즉 문재인 정부 말기에 책이 출간되었으나, 2024년 1월 현재 보면 더 뼈아픈 지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책에서 언급한 것 중에 두 가지만 적어봅니다. 

신뢰 자본

선진국이라고 우리가 부러워했던 유럽 국가들에 가보면 의외로 소매치기가 많습니다. 그리고, 차량 안에 귀중품을 그냥 놔두면, 쉽게 차량을 파손하고 귀중품을 가져가는 범죄가 생각보다 많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카페에 노트북을 펼쳐놓은 채로, 화장실도 가고, 자리를 비우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어딘가에 지갑을 놓고 왔는데, 시간이 꽤 지나서 찾으러 가도 안전하게 지갑이 남아있었던 경험도 가끔 하게 됩니다. 기차를 타기 위해 기차표를 검사하는 사람도 없고, 검표하는 게이트도 없이 바로 차에 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회에 축적된 신뢰가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뢰는 정말 자랑스러워할 만한 자산입니다. 신뢰가 없었다면 모든 사람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보고,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여야 합니다. 신뢰를 저버린 범죄에 대해서는 단호한 제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큰 금액의 횡령을 저지른 재벌 총수나, 큰 금액의 뇌물을 받은 정치인이나, 큰 규모로 주가 조작을 저지른 사람들이 집행유예를 받거나, 금방 사면을 받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뭇사람들이 쌓아놓은 일상의 신뢰가 커다란 권력형 범죄와 송방망이 처벌에 의해 무너집니다. 『권력의 심리학』에서도 말합니다. 권력자가 다른 모든 사람을 범죄자로 간주하고 바라보는 판옵티콘을 사회에 적용할 게 아니고, 부패의 가능성이 높은 권력을 향해 뭇사람들이 감시의 눈을 거두지 않아야 합니다. 


데이터 공개

우리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공공 데이터 지수에서 2015년, 2017년, 2019년에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디지털 전환, 나아가 인공지능의 시대에 데이터는 산업화 시대의 석유와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국 규모의 데이터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생산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국가, 정부에서의 데이터 공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정부 기관에서 공개하는 데이터는 한/글(아래아한글) 형식으로 된 것들이 많습니다. 또, 숫자가 가득한 예산표, 비용 집행표가 그냥 PDF로 공개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사람이 보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데이터는 기계가 읽을 수 있어야, 기계가 처리를 하고, 가공을 하여 새로운 데이터나, 의미있는 인사이트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데이터법 정보 모델 스키마(DATA Act Information Model Schema: DAIMS)가 있어, 예산 보고서를 기계가 처리할 수 있도록 공개된, 표준 포맷을 지정해놓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데이터가 분석 가능한 형식으로 공개가 되면, 정책의 기획, 실행, 평가 단계에서 데이터 기반의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민간 연구소나 기업들이 데이터를 분석하여 새로운 비즈니스,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에는 그 밖에도 우리가 급하게 건너 뛰면서 놓쳐버린 선진국의 요소들을 잘 간파하고, 일부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견제와 균형이 없는 권력(검찰 권력, 판사 조직, 일부 공무원 조직 등)에 대한 문제점, 문제를 정의하지 않고 해결하려는 시도들, 정부 재정 정책에 대한 제언,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교육 등 다양한 이슈들이 나옵니다. IT 현자라고 불리우는 저자의 문제 정의 능력이 돋보이는 책이며,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생성형 AI가 세상을 뒤바꿔버린 2024년 현재 시점에서 보아도 매우 유용합니다. 정부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023-12-27

(나만의) 2023년 올해의 책

2023년에는 총 21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작년보다는 독서량이 조금 줄었습니다. 올해는 인생을 요동치게 만드는 큰 사건에 대한 여파로 하반기에는 집중해서 책을 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당장 해결되지 않을 큰 짐과 난관이 올 때에, 책은 잠시나마 저만의 환상적인 메타버스를 제공해주고, 위안과 새로운 자극이 되었으며, 작은 희망을 가질 수 있게도 해주었습니다. 


2023년 올해의 책


올해의 책을 뽑으려면, 사실 시장 조사라도 광범위하게 해야 하고, 출판계의 흐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고, 또 독서량도 매우 많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저는 제가 오래 보았던 책 가운데, 인상 깊었고, 감동 받았고, 때로는 충격을 받았던 책들을 정리해봅니다. 연초에 읽었던 책들은 벌써 기억이 흐릿해지고 있네요ㅠㅠ.

소설/문학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배반』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배반』


올 초에는 저에게 가장 생경했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배반』을 보았습니다. 동아프리카의 작은 자치 국가인 잔지바르 출신의 학생이 영국에 유학가서, 조국에 불어닥친 혁명의 광풍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영국 사회의 온전한 일원이 되지도 못한 채, 과거의 이야기들을 풀어냅니다. 등장 인물들의 이름, 지명도 낯설고, 아프리카의 문화적, 시대적 배경을 잘 모르다보니,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다 생소했지만,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잘 그려진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한 독자에게도 진한 감동과 재미를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온 온갖 사람들의 기억과 이야기를 토대로 아버지의 삶을 웃프게 소환해낸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제가 유일하게 종이책을 서점에서 구해서 보았습니다. 

이영서 작가의 아름다운 문장과 그림이 빛나는 『책과 노니는 집』은 아이가 학교 과제로 읽던 아동 문학이었습니다. 

김진영의 『마당이 있는 집』은 괴로운 현실에서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고 싶을 때 제가 찾은 스릴러 소설이었습니다. 스릴러 이상의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올해 마지막 소설은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였습니다. 섬세하고 인간적인 이야기가 아름다운 문장에 담겨 있는 작가의 첫 장편 소설인데, 사실 마지막에 예상치 못했던 반전(?)도 있어서, 더 여운을 길게 남겼습니다. 

경제/경영

김정인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국경제사』
김정인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국경제사』


올해는 "경제" 관련 책들을 몇 권 보았습니다. KBS 서영민 기자가 쓴 『거대한 충격 이후의 세계』는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세계 경제의 큰 변화와 사건들의 연결 고리를 심도있게 분석해서 이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에 대한 배려와 대책도 잊지 않은 수작이었습니다. 

김정인 작가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국경제사』는 역사책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손을 떼기 어려운 한국의 경제 흑역사입니다. 오늘날 뒤돌아보면, 우리 나라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왜, 어떻게 일어났었고, 그것이 경제적으로,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명쾌하게 풀어냈습니다. 

박종훈 기자의 『자이언트 임팩트』도 전 세계 거시경제의 흐름을 세계사적인 맥락과 정치/사회적인 배경과 함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올해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세이노의 가르침』이 이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지 좀 애매하긴 한데, 상당히 충격적으로 보았던 책이었습니다. 흔한 자기계발 서적에서는 공통적으로 "긍정적"인 마음과 시각으로 삶을 살아가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식의 서사가 있습니다. 세이노의 가르침은 그런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게, 자수성가한 노인의 경험을 날 것으로 풀어낸 흔하지 않은 자기계발 서적이었습니다. 

인문/과학

하영원의 『결정하는 뇌』
하영원의 『결정하는 뇌』


경영학 교수 하영원의 『결정하는 뇌』는 경영학이나 사회심리학의 의사결정 이론을 한 학기 과정으로 개설했을 때 쓸만한 교과서에 가까웠습니다. 흥미로운 내용들이 쉬지 않고 나오기때문에 밑줄을 긋고, 하이라이트를 한다면 온전한 페이지가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또 교과서이기 때문에 항상 옆에 놓고 참고하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유시민 작가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는 과학도 이렇게 쉽고 친근하게 풀어내는 유시민 작가의 글솜씨와,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 대한 작가의 학습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이 책에서 얻은 과학과 수학에 대한 호기심을 원동력 삼아, 폴 굿윈의 『숫자는 어떻게 생각을 바꾸는가』를 보았습니다. 정통 수학책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많은 숫자와 통계를 접하는 현대인들이 숫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또 인간이 숫자에 왜 이렇게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다음 책

한 권의 책이 끝나면, 다음 책으로 무엇을 볼까 고민하면서 탐색하고 방황하는 시간이 꽤 길어질 때도 있습니다. 한편으론, 다음에 봐야 할 책들이 대기 목록에 올라와 있기도 합니다. 어떤 책이 대기 목록에 올라오는 경로가 몇 가지 있습니다. 

라디오에서 소개/추천해주는 것

저는 KBS 1 라디오를 많이 듣습니다. 운전할 때, 이동할 때, 그리고 집에서 집안일 할 때, 홍사훈의 경제 쇼, 김태훈의 시대음감, 생방송 주말 저녁입니다, 최경영의 최강 시사, 이대호의 성공 예감, 강원국의 지금 이 사람, 주진우 라이브 등을 즐겨 들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많은 프로그램들이 정권의 방송 장악 작전에 의해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아픔도 있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별도의 책 소개 코너가 있거나, 아니면 화제가 되는 작가의 인터뷰가 나오기도 합니다. 가만히 인터뷰를 듣고 있다가 이 사람이 누구지? 라고 사람에 관심이 생기고, 이어서 그 사람이 쓴 책에 관심이 가게 되기도 합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이 소개해주거나, 또는 작가의 인터뷰를 들어보니 참 괜찮다 싶은 경우, 다음에 읽어봐야겠구나 생각이 듭니다. 

같은 작가의 다른 책

좋은 책을 읽고 나면, 이 사람이 쓴 다른 책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갑니다. 그렇게 해서 관심이 생긴 작가는 김승섭, 유현준, 애덤 그랜트, 문유석, 유시민, 박웅현 등이 있습니다. 

참고 문헌

작가들은 책 한 권을 쓰기 위해서 수백 권의 참고 도서를 본다고 합니다. 그 참고 도서 중에 내가 관심이 가는 책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음 책을 고르기도 합니다. 

책 광고/카드 뉴스

포털 사이트나 신문사 사이트에 책 소개가 나오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단순히 텍스트로 책 소개가 나오기도 하지만, 광고인지 기사인지 모를 만화나 카드 뉴스로 나오기도 합니다. 간혹 이런 카드 뉴스를 보고, 그 책을 꼭 읽어보고 싶은 경우가 생깁니다. 

가용성

제가 보는 책의 90% 이상은 전자책입니다. 전자책 디바이스는 스마트폰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휴대하고 다니는 유비쿼티와 극강의 접근성 때문에, 태블릿, PC, 전자책 전용 기기가 대체할 수 없는 편리함을 줍니다. 그리고 읽는 책의 90% 이상은 전자 도서관에서 빌려서 봅니다. 이렇게 전자책과 도서관이라는 두 집합의 교집합에 들어오는 책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교집합 안에서 열심히 뒤져서 다음 책을 고르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2024년에 보고 싶은 책

여러 경로에서 얻은 내용을 바탕으로, 내년에 보고 싶은 책들을 몇 개 골라놓았습니다. 

김승섭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안나의 집을 운영하는 김하종 신부의 『사랑이 밥 먹여준다』는 책은 강원국의 지금 이 사람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알게 되어서, 목록에 올려놓았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는 김승섭 교수의 새 책이기 때문에 믿고 대기 리스트에 올립니다. 얀-베르너 뮐러의 『민주주의 공부』는 퇴행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아이디어를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읽을 목록에 올렸습니다. 『오리지널스』에서 깊은 인사이트를 주었던 애덤 그랜트 교수의 『기브 앤 테이크』는 오래 전부터 읽을 책 상위 목록에 있었는데, 가용성의 범위에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올해 광풍을 일으키며 이미 엄청난 시장을 생성한 생성형 AI 툴들을 정리해놓은 백과사전이랄 수 있는 김덕진 소장의 『AI 2024』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2023-12-16

이모들의 다정한 마음이 전해지는, 백수린 작가의 《눈부신 안부》

배수린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

우리말 가운데 "이모"라는 단어가 주는 친근함을 과연 외국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소위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가서 젊은 시절을 낯선 땅에서 보내며 살아왔던 이모들의 이야기가, 누구의 마음도 다치지 않게 하려는 듯 선의의 거짓말처럼 세심하게 펼쳐진다. 처음에는 불의의 사고로 언니를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 주인공 해미의 눈으로, 나중에는 해미가 자라면서 조금씩 성숙해진 시각으로 다시 바라본 주인공과 이모들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마치 커다란 유화를 돋보기를 대고 조금씩 조금씩 살펴보자, 저쪽 한편에서는 알지 못했던 색깔과 질감을 다른 한편에서 발견하면서 풍성함을 얻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 하거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지극한 정성과 수고가 필요하니까.

지극한 정성과 수고는 곧 사랑이며 배려이다. 해미의 친구 레나, 한수가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아주려는 노력도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배려이다.

나는 유리병에 담아 대 대서양에 띄우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네게 보낸다. 나를 위해 너의 편지를 전해준 아이들의 마음이 나를 며칠 더 살 수 있게 했듯이.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다정한 마음은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면서도 눈부신 독일의 햇살에 감탄했던 선자 이모에게도, 그리고 사고로 가족을 잃은 주인공에게도,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에게도, 그리고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안부를 걱정해주며 위로해준다.

내 삶을 돌아보며 더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2023-12-05

숫자는 어떻게 생각을 바꾸는가. 숫자를 이용하는 것은 결국, 인간!

제가 초기 회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인상 깊게 들어서,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살았던 조언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측정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

무엇이든 정량화하고, 순위를 매기고, 척도를 만들고, 범주를 나눔으로써 소통이 쉬워지고, 애매모호한 것이 명확해지고, 취약점이 드러나고, 데이터에 기반한 정당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진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런 맹목적인 "수(number)"에 대한 권위 부여는, 숫자가 빠진 의사 소통에 대해서는 객관적이지 않고, 비과학적이며,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게 만듭니다. 통계학자인 폴 굿윈의 《숫자는 어떻게 생각을 바꾸는가》에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숫자와 관련된 우리의 실수를 짚어줍니다.

숫자는 어떻게 생각을 바꾸는가: 데이터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폴 굿윈 지음. 신솔잎 번역
숫자는 어떻게 생각을 바꾸는가: 데이터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폴 굿윈 지음. 신솔잎 번역

전반부에서는 숫자가 잘못 쓰이거나 지나치게 강조되어 현실을 왜곡할 가능성에 대해 다룹니다. 숫자, 지표, 측정치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이것을 발표하고, 공유하고, 읽고, 해석하고, 의사결정하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 모든 과정에서 왜곡과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정말 많은 역사적 에피소드와 현실 사례들이 나옵니다. 후반부에서는 정확하고 정직한 숫자가 제시되어도, 그것을 놓치고, 외면하고, 무시하게 되는 이유와 위험에 대해 다룹니다. 

1장에서는 순위에 대해 다룹니다. 입학, 졸업, 입사, 성과 평가, 입찰, 선거, 오디션, 베스트셀러 선정, 올해의 배우 등 우리는 순위에 의해 희비가 엇갈리는 많은 사건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과연 이것을 순위로 매기는 것이 타당한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경우도 매우 많습니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케네스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impossibility theorem)였습니다. 세 개 이상의 서로 다른 대안이 있을 때, 투표권을 가진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선호 순위를 잘 반영하는 투표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특히 여러 가지 지표를 종합한 종합 순위를 매기고, 그것을 정말 중대한 곳에 활용하는 것의 문제점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 종합 순위 대신에 왜곡의 가능성이 적은 개별 척도(hot indicator)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2장에서는 프록시 지표에 대해 다룹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울 때, 대상의 속성을 반영할 것으로 보이는 간접적인 측정치를 프록시 지표라고 합니다. 프록시 자체의 타당성도 문제이지만, 지표 자체가 목표가 되어 부정적인 결과를 나을 수 있다는 것이 굿하트의 법칙(Goodhart's law)입니다. 폭스바겐은 배기가스 배출 기준이라는 지표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극단적으로 소프트웨어를 조작하는 부정까지 저지르게 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프록시 지표로서 오랫동안 확고한 지위를 누려온 국내 총생산(GDP), 지능지수(IQ)에 대한 문제점, 오용된 사례들도 나옵니다.

3장에서는 대표성(representativeness) 문제를 다룹니다. 가장 많이 쓰이는 "평균"이라는 대표값은 사실 집단 구성원 누구도 대변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평균값을 근거로 집단의 특성을 간편하게 특징짓고, 유형화(stereotype)하는 것의 위험을 이야기합니다. 2018년에 보았던 토드 로즈의 《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전투기 좌석을 설계할 때, 모든 조종사들의 평균 체형을 고려하여 만든 결과, 어떤 조종사에게도 맞지 않은 좌석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쨌든, 복잡하고 다면적이고, 개별적인 개체들을 단 하나의 대표값으로 단순화해서 의사소통할 때에는 항상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평균의 종말: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토드 로즈 지음
함께 읽으면 좋은 책. 평균의 종말

4장에서는 범주화(categorization)와 경계(border, boundary)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논문을 쓸 때, 연구자들은 통계적인 유의 수준(significant level)으로 피셔가 제안한 0.01 또는 0.05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영가설이 참일 때, 이런 실험 결과가 나올 확률은 5%나 1%보다 낮으니, 영가설을 기각한다라는 논리를 사용합니다. 저도 논문 쓸 때, 유의미한 극단적인 확률값이 나오면, "별이 떴다!"라고 하면서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 5%, 1%라는 기준은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임의의 경계선 안에 들어가기 위해 합법적이거나 편법적인 방법으로 데이터를 조작하고 싶은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89.5로 B 학점을 받은 사람과 90점으로 A학점을 받은 사람은 완전히 다른 범주로 분류되고 큰 차이로 지각되지만, 99점을 받은 사람과 90점으로 A를 받은 사람은 같은 범주로 묶이게 됩니다.

5장에서는 특이하게 라이프트래커, 라이프로깅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마트워치와 같이 24시간 나와 함께 하는 디바이스의 등장으로 나의 많은 신체 활동과 상태를 숫자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숫자들이 나의 다채롭고 복잡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여론 조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론 조사는 원칙적으로 무작위 샘플링을 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질문 상황, 답변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오염과 왜곡이 생깁니다. 보통은 조사 기관에서 밝히는 오차 범위보다 훨씬 큰 오차 범위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론에서는 사소하게 발생할 수 변화에 대해 과도한 서사를 붙여서 여론을 왜곡하거나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언더독 효과, 밴드왜건 효과, 헤딩(herding) 효과 등 여론 조사 결과를 왜곡시킬 수 있는 심리사회적인 기제들도 많습니다.

7장은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하는 행복도, 삶의 질, 고통의 정도 등의 지표에 대해 다룹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1위부터 후순위에 있는 나라까지 발표되면, 각 나라 정부와 정치인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순위를 해석하고, 정책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응답자들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는 있었던 것일까요? 순간적인 다른 변수에 의해 응답이 매우 달라질 수도 있는 불안정하고 불분명한 것에 대해 현미경을 들이대어, 소수 세째 자리로 갈리는 행복도 순위는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오픈AI의 이사진들이 지향했었다는 (피터 싱어의) 효율적 이타주의의 이야기도 잠깐 나옵니다.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과 같은 이타주의를 실행하는 데에 있어서도 정량화된 지표에 기반해서,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가 큰 곳에 기부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효율성을 타당하게 어떻게 정량화하느냐 문제가 제기됩니다.

8장은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있는, 사전 확률에 대한 고려를 이야기합니다. 즉,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 이야기입니다. 검사의 오류(presecutor's fallacy) 이야기를 보니, 잘못된 확률 판단으로 인해 유무죄를 판단하는 형사법정에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판결이 나올 수도 있더군요. 코로나19 백신의 효과, 음주 운전자의 식별, 범죄 용의자나 테러리스트의 식별, 거짓말 탐지기의 효과와 같이 매우 민감하고, 치명적인 곳에서 기저 확률을 고려하지 않은 확률 판단에 오류가 생길 경우, 그 여파는 심각할 수 있습니다.

9장에서는 정확한 숫자가 제시되어도 우리의 기존 신념에 반하는 경우, 왜 우리는 그것을 종종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는지를 다룹니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사전 확률을 0 또는 1로 놓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새로운 증거가 제시되어도, 우리의 믿음을 바꿀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교육 수준이 높거나 과학적인 사고를 훈련받은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어 노벨병(Nobel disease)라고도 불립니다. 또, 역화 효과(backfire effect)는 기존 믿음을 반박하는 사실(예: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없었다!)이 나와도, 기존 믿음이 오히려 더 견고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때로는 집단이 객관적인 정보를 무시하고, 집단 사고(group thinking)에 빠질 경우, 케네디 대통령의 쿠바 피그스만 침공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에서 보듯이 극단적인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부산 엑스포 유치에 대한 과장된 기대와 유치 실패의 원인을 집단사고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10장에서는 과장된 공포 마케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 가지 지표들은 현대 사회가 옛날보다 나아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디어에서 주목하는 것은 낮은 확률이지만 극적으로 보이는 비행기 사고, 끔찍한 흉악 범죄들입니다. 공포를 조장해 이득을 보는 세력들과, 부정적인 뉴스에 더 주의를 쏟게 되는 우리의 뇌가 함께 작용하여 세상이 점점 더 험악해지고, 미래는 더 어둡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공포 마케팅은 언론, 기업, 종교, 선동적인 정치인들이 즐겨 사용하여, 때로는 잘못된 투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정확한 숫자와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메시지가 나오게 된 동기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11장에서는 통계적 사고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의심스런 통계치나 숫자를 대할 때에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판단(시스템 1 사고)과 함께, 느리고 깊게 생각해보는 시스템 2 사고를 병행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정보가 한결같이 편향되어 있어도, 일관성이 있고, 명쾌하게 일치할 때 우리는 타당하다는 착각(타당성 착각, illusion of validity)에 빠진다고 합니다.

어쩌다보니 책의 내용의 주요 부분을 인용 부호 없이 거의 인용, 요약해버렸습니다. 그만큼 곱씹어보고 싶은 내용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 책은 서점에서 "자연과학", 수학 관련 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숫자가 많이 나오지 않고도 숫자 이야기를 쉽게 전해줍니다. 그리고 사실, 숫자를 만들고, 가공하고, 조작하고, 읽어들이고, 해석하고, 공유하고, 적용하는 인간의 특성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옵니다. 그런 면에서 훌륭한 심리학 서적입니다. 2023년을 시작할 때 서강대학교 하영원 교수의《결정하는 뇌》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수많은 의사 결정(decision making)을 해야 하는 우리 인간은, 매우 많은 실수를 하고, 합리적이지 않고, 편향에 휘둘린 결정을 합니다. 숫자가 중요한 이유는, 숫자를 기반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제한적인 특성을 이해하고, 또 드러난 숫자 뒤에 숨겨진 숫자와 의도, 의미를 파악하려고 더 노력하면, 조금은 더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결정하는 뇌
함께 읽으면 좋은 책. 결정하는 뇌

2023-11-24

자이언트 임팩트, Those were the good old days!

KBS 박종훈 경제 기자가 쓴 《자이언트 임팩트》를 읽어보았습니다. 원래 자이언트 임팩트 또는 테이아 가설로 불리우는 이 용어는, 45억년 전에 지구가 화성만한 크기의 테이아와 충돌하여 달이 탄생했다는 유력한 과학적 가설입니다. 저자는 그것에 견줄만한 세계 경제의 커다란 변화와 충격 4가지를 거론하며,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의한 글로벌 분업 시대, 초저금리 시대, 인플레이션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았던 시대, 고성장 시대는 이제 지나간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과거 30~40년의 경제 작동 방식을, 앞으로도 비슷하게 적용하여 예측을 한다면 틀린 예측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자이언트 임팩트. 박종훈 지음
자이언트 임팩트. 박종훈 지음.

그 네 가지 자이언트 임팩트는 인플레이션, 금리, 전쟁, 에너지입니다. 경제학적 기본 지식이 없는 저같은 사람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설명해놓았습니다. 책의 내용을 여기에 요약하는 것은 저의 능력 밖의 일이라서, 각 항목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적어봤습니다.

첫 번째는 '인플레이션'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특별히 물가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 장기적인 저물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큰 이유로, 미국이 움켜쥔 세계의 패권에 따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 원활하게 이루어진 분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갑자기 찾아온 공급망의 문제, 그리고 피부로 느껴지는 고물가에 우리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 연준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계속 올리고, 우리 나라는 정부가 물가를 인위적으로라도 잡으려고, 가히 관치 경제라고 할 만큼 깊게 개입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플레이션이 과연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여러 가지 환경의 변화로 이제 더 이상 물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좋던 시절(the good old days)은 다 지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물건의 값인 물가에 이어, 돈의 값인 '금리'가 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이례적으로 저금리 현상이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미국 연준이 빅스텝, 자이언트 스텝이라 불리는 금리 인상을 연속해서 단행하고, 이제 언제 기준 금리를 동결할 것인지가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과거처럼 저금리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높은 저축률에서 비롯되었던 풍부한 자금이 줄어들고,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서는 금리를 다시 올리는 것을 검토해야 합니다. 게다가 고령화로 인한 자금 시장의 변화,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정치적인 리스크가 저금리를 계속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실, 경제 뉴스를 볼 때마다, 금리와 다른 경제 변수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저같은 경제학 맹에게는 항상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면, 금리와 채권 가격의 관계 같은 것 말이죠. 어쨌든 그동안 저금리 현상에 잘 적응하여 주식이나 부동산 가격의 상승을 이용한 과거의 투자 전략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게 되어간다고 할 수 있겠네요.

세 번째는 바로 전쟁입니다. 미국이라는 원톱 초강대국 체제의 세계 패권이 이제 미국과 중국이라는 투톱으로 바뀌고, 거기에 유럽, 동아시아의 신흥국, 에너지 패권을 쥔 러시아, 중동 나라 등이 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직접적인 무력 도발인 전쟁, 또는 패권 전쟁, 공급망 전쟁, 기술 전쟁, 국지 전쟁의 위험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정말로 침공할 것이라고 생각을 못했었지요. 게다가 그 전쟁이 이렇게 오랫동안 출구를 찾지 못하고 계속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또는 하마스)간의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은 당사국 국민들에게는 당연히 말할 수 없는 고통이고, 그 여파는 에너지, 식량, 인플레이션 등으로 전세계에 미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전쟁을 대하는 나라들의 이해관계도 단순하지가 않아서, 이제 나라들도 각자도생, 개인들도 각자도생의 시대가 오며, 예측 가능성은 낮아지고, 변동성은 매우 커지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로 언급된 것이지만, 결코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에너지'입니다. 한 때, 원유 고갈에 대한 대안으로 셰일 가스가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주목받았었던 기억이 납니다. 셰일 가스가 발견되면서 미국은, 중동이나 러시아와 같은 원유 생산국에 대한 의존과 간섭을 줄이려고 했었죠. 그러나, 셰일 가스가 여러 이유로, 미국이 바라는 대로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원의 역할을 잘 못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독재자라고 비난했던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를 찾아가 원유 생산을 늘려달라고 싹싹 빌었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사우디와 중동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이란은 미국과 핵 합의 복원을 하려고 하면서도,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 전쟁과 핵무기 기술 확보 등의 여러 가지 변수가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유럽은 어떻습니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에 크게 의존했던 천연가스 공급이 어려워지자, 겨울 난방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또, 화석 연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신재생 에너지로 전환하려고 해도, 발전에 필요한 원자재와 부품은 대부분 중국이 키를 쥐고 있습니다. 비교적 안정적으로 풍부한 화석 연료 에너지를 활용해서, 고성장을 이룩했던 시대는 또 하나의 옛날 이야기가 되어가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습니다. 불확실성과 변화만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미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시대에 변화를 읽는 거시적인 안목을 갖추고, 거기에 국가, 사회, 개인이 어떤 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고 싶다면, 한 번 읽어보십시오.

거대한 충격 이후의 세계: 알아두면 반드시 무기가 되는 맥락의 경제학. 서영민 지음
거대한 충격 이후의 세계: 알아두면 반드시 무기가 되는 맥락의 경제학. 서영민 지음

이전에는 서영민 기자의 《거대한 충격 이후의 세계》라는 책을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충격 이후 급하게 변화하는 세계 경제를 변화시키는 여러 가지 현상과 요인들, 특히 반도체 문제, 인구와 기후 위기, 빈곤의 문제 등을 포함해 깊게 파헤치는 책이었습니다. 기자란 모름지기 발생하는 "피상적인 사건에 숨겨져 있는 고구마 줄기와도 같은 원인들을 깊게 파헤쳐 분석해주는 역할을 하는 직업이구나"라는 생각을 다시금 상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책도 같이 보면, 거시 경제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2023-11-11

스마트폰에 중독된 현대인을 위한 책, 호모 아딕투스

호모 아딕투스: 알고리즘을 설계한 신인류의 탄생. 김병규 지음.

김병규 교수가 쓴 《호모 아딕투스》를 읽어보았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거의 모든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새로운 경제 메카니즘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물건 자체가 귀하던 제품 경제의 시대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관심 경제의 시대, 이제는 알고리즘으로 사람들의 시간을 하염없이 붙잡아 둘 수 있는 중독 경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중독 대상은, 고통이 따르는 지출을 동반하거나, 일상적으로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심각성이 좀 덜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마트폰 세상 속에서 우리가 접하는 쇼핑, 뉴스, 게임, 쇼셜 미디어, 유튜브 등은 많은 경우 공짜이기도 하고, 매우 적은 노력으로 손 안에서 바로 실행 가능한 점이 다르다고 합니다. 게다가 내 손 안의 현금이 줄어드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 카드 결제, 앱 안에서의 포인트 사용 방식으로 지출을 하면, 소비할 때 느껴지는 고통이 훨씬 덜하다고 합니다. 많은 데이터를 가진 빅테크 기업들이 정교하게 짜놓은 알고리즘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사실은 보여지는 것을 계속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거대 기업들의 정교한 낚시에 걸려 점점 대상에 중독되어 가면서도,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했다는 착각에 빠져 살게 됩니다.

저 자신을 한 번 돌아봅니다. 나는 무슨 중독에 빠져있을까? 다행히도, 저는 게임이나 쇼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때 뉴스에 강박적으로 빠져 살았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중요한 일에 몰입하거나, 진지한 독서를 못 하게 하는 가장 큰 훼방꾼은 뉴스였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언제든지 확인 가능하고, 끝없이 업데이트되고,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식이 가득한 뉴스를 계속 확인하게 되는 상태가 계속 되었습니다. 물론, 뉴스를 전혀 모르고, 현 사회를 살아가기는 힘들지만, 나에게 아무런 연관도 없고, 쓸데도 없는 "최신" 뉴스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은 분명히 좋지 않았습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좋아요"라는 간헐적 보상도 있지만, 올라오는 소식의 "최신성"이 더 중독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 독서를 하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다른 공부를 하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내내, 포털 사이트를 뒤적거리며 최신 뉴스를 확인하고 나면, 너무 허무했습니다.

책에서는 중독 경제 메카니즘을 잘 이해하고, 거대 기술 기업들이 주도하는 중독 경제 세상에서, 소규모 비즈니스 주체가 살아남는 전략을 몇 가지 제시합니다. 마이크로 어딕션(micro-addiction) 전략은 비교적 작은 스케일로 중독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예로 10대들이 좋아하는 틱톡,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소셜 미디어 레딧, 고도의 큐레이팅이 들어간 쇼핑몰 29CM 등의 사례가 나옵니다. 두 번째는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을 도와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어딕션 프리(addiction free)전략입니다. 이 전략을 적용한 비즈니스 사례로 결심을 실행하게 도와주는 챌린저스, 광고 없이 고품질의 글이 유통되는 플랫폼 미디엄 등을 제시합니다. 그 외에도 책을 읽어보면, 더 세분화된 비즈니스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후반부에서는, 중독 경제 시대에 중독에 빠지지 않고, 현명하게 개인이 살아가는 방법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광고를 꺼놓는다든지, 스마트폰의 알람을 꺼놓는다든지, 소비를 미루는 습관을 들이는 것 등을 제시합니다. 나아가, 중독 경제 시대를 이끌어가는 데에 필요한 인재상과 역량을 제시합니다.

책에는, 갤럽이 시행한 한 관찰과 행동 분석에 따르면, 직장인들이 방해를 받지 않고 한 가지 업무에 집중하는 시간이 평균 3분 5초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결과가 소개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업무를 방해받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23분 15초가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 뉴포트는 멀티태스팅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진정한 생산성은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딥 워크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의도하지 않게 어떤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을 중독이라고 한다면, 의도한 일에 의식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딥 워크: 강력한 몰입, 최고의 성과. 칼 뉴포트 지음. 김대훈 옮김.

중독 경제 메카니즘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고, 전략입니다. 그 안에서 비즈니스 주체로서, 또는 일의 주체인 개인으로서 어떻게 대처할 지에 대해 책과 함께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2023-10-19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림이 있는 동화책, 《책과 노니는 집》

책과 노니는 집. 이영서 글. 김동성 그림
책과 노니는 집. 이영서 글. 김동성 그림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읽어보고, 내용과 단어가 너무 어렵다고 하여, 도움을 주기 위해 저도 읽어보았습니다. 제9회 문학동네 어린이 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품이라니 어떤 작품일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야기의 배경은 조선 후기 천주학이 학문으로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에 서울입니다. 주인공 장이는 책을 필사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아버지와 살고 있는 어린 소년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천주학 책을 필사했다는 이유로 죽도록 맞아, 소년은 세상에 홀로 남겨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죄 없는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모진 놈들......

아버지에게 일감을 주었던 책방 주인 최 서쾌가 아버지가 죽기 전에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보편적인 사람의 상식과 정서에서 아버지는 죄 없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국가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해 탄식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국가가 보았을 때 죄가 됩니다. 그러나 통치자가 만들어놓은 합법의 테두리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설사, 그 시대 기준으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죽을만큼 맞는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죄가 있다고 신체적인 형벌을 주는 일, 그리고 사람의 목숨까지 국가가 빼앗아가는 일이, 현대 사회에서는 이제 많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다행인 걸까요.

국가의 정책, 지배자의 통치 방향과 다르다는 이유로 조선 말기에 천주학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되었다고 의심받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학을 접한 사람들은 더 많아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엄격하게 계급이 구분되어 날 때부터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구분되는 신분 사회의 모순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를 따라가지 못한 국가는 가혹한 탄압을 행합니다. 왕조 시대와 식민지 시대를 거쳐서 민주 공화국이 되고, 절대적인 통치자, 왕에 의한 지배에서,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 사회가 된 우리 나라! 정말 많이 진보했습니다. 그러나, 그 법이 정의, 평등, 인권, 사상의 자유 등 인간의 이상을 반영하지 못한 상태에서, 법 통치자에 의해 잘못 휘둘러지는 경우는 없는지도 생각해봅니다. 

혼자였던 장이를 도와주는 사람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최 서쾌의 도움으로 필사한 책 배달을 하게 된 소년, 장이. 이번에는 동네 불량배인 허궁제비에게 큰 괴롭힘을 당하고 난처한 처지에 빠집니다. 가족도, 도와줄 사람도 없는 장이는 혼자서 끙끙대며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장이는 고립무원의 약자가 아니었습니다! 가족이 없는 장이에게 일터를 주었던 최 서쾌, 도리원에서 만난 낙심이, 청지기 아저씨, 미적 아씨, 지물포 주인 오씨 등이 모두 합심하여 도움을 주었습니다! 최 서쾌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감당할 수 없거든 도움을 청하란 얘기다....... 휴우.

도움을 제공한 장이

관아에서 다시 천주학 관련자를 대대적으로 색출하여 잡아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번에는 그동안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장이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홍 교리에게 장이가 큰 도움을 제공합니다!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지만, 외로운 현대인들은 각자 도생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장이는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줄 수 있는 행복을 가졌습니다. 국가 폭력이 지금보다 훨씬 더 거대한 과거 왕조 시대로 결코 돌아가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어려울 때 서로 도움을 주고 외면하지 않는 것이 조상들의 보편적인 정서였다면, 현대인으로서 그런 옛날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마무리

소년 장이의 성장 소설일 수도 있고, 조선 후기의 역사 소설일 수도 있습니다. 장이라는 순진한 어린이의 시선을 따라 책과 관련된 이야기가 담담하게 그려지면서, 책읽기를 권장하는 어린이 문학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성격을 다 갖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과함이 없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책을 많이 보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역사가 너무 도드라지지도 않으며,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하지도 않습니다. 이야기는 알차게 꽉 차 있지만, 이를 읽는 독자들에게는 각자의 생각과 느낌, 상상으로 채울 수 있는 여백이 아주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와 한 몸이 된 듯한, 아름답고 따스한 삽화가 없었다면, 책읽기의 즐거움이 반감되었을 것입니다.

2023-10-14

완벽해 보이는 가정의 균열, 《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작가의 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작가의 마당이 있는 집


현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나는 소설을 든다. 소설에 빠져들며, 현실의 아픔을 잠깐 잊고 싶어서. 이번에는 오랜만에 읽은 스릴러 소설. 운명이 다른 두 여자의 가정이 무너져가는 이야기가 짧은 며칠 사이에 극적으로 전개되며 쉽게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2023년 나의 현재의 암담한 상황과 소설 속의 상황이 자꾸 오버랩 되면서 읽는 동안 계속 깊은 계곡으로 빠지는 느낌이 들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추리 소설이라고 하면 보통은 사실이 상당히 나중에 밝혀지는 반면, 이 작품은 중간중간에 두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사실들이 하나 둘씩 드러나게 되므로 추리물은 아니다. 그러나 끝까지 결말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게 만들고 긴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써본 작가의 소설적 재미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완벽해 보이는 의사 남편을 둔 김주란의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미묘한 균열을 세밀하게 그려지고, 아마 그런 점에서 공감이 가는 부부들도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남편은 아내를 자상하게 보호해주는 것 같고, 아내는 그의 틀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김주란이 문제 제기를 할 때마다 그냥 미안하다, 그만하자로 대충 마무리해버리는 남편의 모습.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의문을 갖고, 자신을 믿지 못하는 아내, 김주란의 모습. 그냥 참고 넘기면 그냥 계속 평온할 지도 모를 관계에서 조그마한 균열이 파국을 향해 급하게 달려간다. 완벽한 가정이란 이 세상에 없는 것인가? 괜찮아 보이는 가정, 그리고 처음부터 문제가 있어 보이는 두 개의 가정의 모습을 보고, 이 세상 많은 가족 구성원들이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가족의 구성원 모두가 동의할 이상적인 가정은 어떤 모습일까?

같은 제목을 가진 드라마로도 작품화되었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다. 김진영 작가의 차기작을 기대해본다.

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저, 엘릭시르

2023-10-08

나의 과학적 지식 수준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책표지

나는 수학이나 과학을 싫어하거나 크게 겁내지는 않았다. 내가 궁금해하는 문제에 대해 과학적 사고를 하는 법과 과학적 원리를 모르는 내가 답답해, 대학교에서도 공대의 음향학 수업을 듣거나, 다른 과에 가서 미적분학, 미분방정식 등 수학, 그리고 컴퓨터 프로그래밍 수업을 찾아들었다. 최근 몇 년을 돌이켜봐도, 미적분의 힘이나, 뇌과학의 모든 역사,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와 같은 교양 과학 서적들을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유시민 작가의 책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보면서, 한참을 반성했다. 정말 과학적인 기초 사실들에 대해 내가 이렇게 대충대충, 건성으로 들어만 본 것을 아는 체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표적인 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생물이 진화한다는 진화론에 대해 나는 너무 무지했었다. 생존에 유리한 자연 선택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유전자에 어떻게 반영된다는 것인지 너무 몰랐었다. 

우주의 탄생, 그리고 그것이 현재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주기율표에 나오는 원소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원자핵과 전자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앞으로 우주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이제야 조금 손에 잡힐 듯이 이해하게 되었다. 

뇌과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학의 과학적 발견들을 탐색하며,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인문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하나하나가 대충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스스로 "거만한 바보"를 겨우 벗어난 "문과" 남자라고 칭한 저자는 훌륭한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쓴 수많은 과학 교양서들의 도움을 받아, 다른 어떤 커뮤니케이터보다도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참고했던 책들은 그대로, 독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훌륭한 과학 교양서들이다. 이 목록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었다. 코스모스, 원더풀 사이언스, 세계를 바꾼 17가지 방정식,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엔드 오브 타임, 원소의 왕국, 사회생물학 대논쟁, 통섭: 지식의 대통합, 생명이란 무엇인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불확실성의 시대, 김상욱의 양자 공부, 세상의 모든 수학,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내가 누구인지 뉴턴에게 물었다, 어느 수학자의 변명 등 그 중에 몇 가지만 나열해도 풍부한 추가 읽을 거리가 생긴다. 

인상깊었던 부분은 나열할 수 없이 많지만, 아무래도 마지막 장에 나온 수학에 관해서 영국 수학자 하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다. 수학과에 가면 도대체 논문을 어떻게 쓸까? 수학과에 가는 그 많은 사람들이 수학적인 발견을 하나씩 해내어 논문을 쓰는 걸까? 하디는 산술, 대수학, 유클리드기하학, 미적분학, 공학, 물리학, 경제학, 사회과학 전공자가 배우는 수학은 "하찮은 수학"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수학은 세상에 유용하게 쓰인다. 그런데 현대의 기하학과 대수론, 정수론, 집합론,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은 아름다운 "진정한 수학"이지만, 세상에 쓸모가 없다고 하였다. 물론 이런 이분법은 맞지 않다. 상대성 이론이 없었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내비게이션만 해도 엄청난 오차 때문에 전혀 쓸모가 없게 된다. 유시민 작가는 다른 과학과는 다르게, 소위 "진정한 수학"을 하는 수학자들은 "인간계"가 아닌 "신계"에 속한 사람들 같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천재 수학자 가우스를 예로 들면서. 

학교 다닐 때, 수학 좀 잘 한다는 사람들은 수학에 많이 의존하는 과학을 하면 잘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수학을 잘 한다는 것이, 새로운 "신계"의 수학적 발견을 해낸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인가 보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몇몇 과학자들에게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내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충분히 밑줄 치고, 메모하면서 보지 못해 아쉽다. 책 반납일을 단 며칠 앞두고 펼치기 시작해서 다 볼 수 있을까 걱정하였다. 하지만 너무 속도감있고 재미있게 책장을 넘길 수 있어서, 그건 쓸 데 없는 걱정이었다. 인문학과 과학이 만나서 어떻게 세상의 문제들을 설명해가는지 궁금한 사람들은 이 책에서 여정을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돌베개]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돌베개, 유시민

2023-10-05

개리 마커스의 《클루지》

클루지: 생각의 역사를 뒤집는 기막힌 발견
클루지: 생각의 역사를 뒤집는 기막힌 발견

저자 개리 마커스(Gary Marcus)는 심리학자이자, 인지과학자입니다. 많은 심리학적 발견들은 인간의 뇌 활동이 많은 오류와 편향(bias)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을 하죠. 개리 마커스는 우리 몸에 진화적인 관성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신체 구조가 남아 있는 것처럼, 우리의 뇌에도, 비합리적이거나 잘못 설계된 흔적들 투성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 뇌가 관장하는 우리의 기억, 신념, 의사 결정과 선택, 언어, 행복과 쾌락의 추구 과정에도 불합리하고, 엉성한 측면들이 많다는 것이죠.


다니엘 카네만이 구분했던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시스템 1 사고와, 의식적이고 통제된 숙고를 하는 시스템 2 사고 비슷한 개념이 나옵니다. 아주 오래된 인류 진화의 산물인 반사 체계(선조 체계)와 비교적 최근에 진화하여 좀 더 합리적인 처리를 하는 숙고 체계를 구분합니다. 이 두 체계의 갈등에서 많은 경우, 사람들이 반사 체계가 우선적으로 작동하여, 클루지스러운 기억, 신념의 형성, 의사 결정, 나중에 후회할 선택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과 동기에 의한 추론(motivated reasoning), 점화 효과(priming effect), 닻내림 효과(anchoring effect), 후광 효과, 언어의 불완전성 등이 대표적인 클루지로 소개됩니다. 이 글에서는 대표적이지는 않지만, 제가 인상깊게 보았던 몇 가지 클루지를 여기에 소개합니다.


생생하고, 개인적이고, 일화적인 기억


여러 사례가 개입되고 통계학적으로 뒷받침되는 다른 정보보다, 내가 개입되거나, 나의 경험이 들어가 있는 일화적인 기억을 우선시해 의사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비자원에서 나온 보고서는 종합적으로 A 상품이 더 좋다고 하는데, 어떤 한 사람의 일화에서 A상품이 결함이 있어서 B 상품을 추천한다고 하면, 결국 내가 상품을 선택할 때 생생하고 일화적인 것에 굴복하여 B를 선택할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나의 특수한 경험은 사례 수가 제한되어 있는데, 그것을 일반화하여, 나중에 의사결정이나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는지 조심해야겠지요.


스피노자의 가설


철학자 스피노자는 "모든 정보를 이해와 동시에 (먼저) 받아들이고 ...... 틀린 정보는 ... (나중에야) 물리친다"고 말하였다. 이것을 검증하기 위해 심리학자 길버트는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주의를 분산시키는 방해을 받을 때, 거짓 명제를 받아들이는 빈도가 증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게 하찮아보이지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고 하네요. 아동 포르노물을 소지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한 미국의 한 정치인은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가 입은 손상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법률에서는 '유죄로 증명되기 전까지는 무죄'라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는 것이 문제랍니다. "당신이 열두 살 때부터 포르노 잡지를 읽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이런 식으로 질문만 받아도 그것을 사실로 믿기에 충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사실로 믿기 전에 의도적으로 의심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가까운 것과 먼 것


우리의 마음은 가까운 것과 먼 것에 대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가까운 것은 더 구체적으로, 먼 것, 먼 미래는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구 온난화는 2050년에야 현실로 다가올 먼 미래라고 생각할수록, 현재에 나의 행동과 대처에 아무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가까운 것과 먼 것에 대한 생각을 균형있게 해야 합니다. 그 한 가지 방법으로 '잠시 기다리기'를 택할 수 있습니다. 비합리성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반면에, 복잡한 결정은 시간을 두고 그것에 몰두할 때 가장 훌륭하게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 책이 번역된 시기가 2008년이니 꽤 오래 전에 나왔네요. 저자 개리 마커스는 책에서 인터넷에 각종 정보가 넘쳐나던 당시를 '폭로된 진실'의 세계라고 칭하며 아이들이 인터넷에 있는 정보를 절대적 진리로 쉽게 믿어버릴 위험성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대립되는 증거들을 평가하는 법을 가르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생성형 AI가 나온 2023년 현재에도 매우 유효한 주장입니다.


내친 김에, 저자에 대해 좀 더 찾아보니, 2016년에 우버(Uber)에 인수된 지오메트릭 인텔리전스(Geometric Intelligence)라는 머신러닝 스타트업의 공동 창업자였네요. 2019년에는 로버스트에이아이(Robust.AI)를 설립했다고 하구요. 그리고 최근에 나온 TED 비디오에서 그는 생성형 AI가 허위 정보를 퍼뜨릴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AI의 두 가지 전통적 접근법(심볼릭 접근법과 연결주의 접근법, 즉 오늘날의 신경망)을 보완적으로 사용하여 허위 정보 생산의 위험성을 줄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며 서로 대립하는 오늘날, 우리가 불완전하고, 클루지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더 좋은 해결책을 찾기 위한 출발점일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결점과 클루지를 이해하고, 겸손한 자세로, 더 현명한 판단과 선택을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합니다.

[갤리온]클루지 : 생각의 역사를 뒤집는 기막힌 발견 (리커버 에디션), 갤리온, 개리 마커스

2023-06-09

개인용 무료 클라우드 저장소 비교

클라우드 스토리지

예전에 Microsoft 365 Family를 쓰다가, 모든 구독 서비스를 포함해, 들어가는 돈을 아끼기 위해 무료 버전으로 전환하였다. MS 오피스 프로그램은 리브레 오피스구글 드라이브에 있는 앱들로 아쉬운대로 대체하였는데, 클라우드 스토리지 1TB가 갑자기 5GB로 줄어서 그동안 보관해두었던 문서들을 어디로 옮겨야 할 지 난감하였다. 물론 전체 파일은 대략 10G 정도 되어서 무지막지하게 많지는 않다.

할 수 없이 여러 개의 클라우드 스토리지에 나눠서 저장하기로 하였다. 많이 쓰이는 개인용 클라우드 스토리지 특징들을 아래 표에 정리해보았다.

개인용 클라우드 스토리지 서비스 비교 (무료 플랜에 한해서)

서비스 제공하는 용량 특징
구글 드라이브 15GB 구글 독스, 스프레드시트, 프레젠테이션, 폼, 포토, 지메일 등의 용량을 다 합쳐서 계산. 데스크탑용 드라이브  있음.
원드라이브 5GB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에서는 보통 랜섬웨어에 대비한 백업용으로 기본값으로 지정되어 있음. 온라인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 폼, 그리고 원노트를 사용할 수 있음.  데스크톱용은 윈도우와 맥에서 사용 가능.
드롭박스 2GB 데스크톱인 윈도우, 맥, 리눅스는 물론 안드로이드, 아이폰 등 지원.
iCloud 5GB 아이폰, 아이패드, 아이팟 터치, 맥에서 사용 가능. 아이클라우드 사진 스트리밍 기능
네이버 MYBOX 30GB 맥과 윈도우용 데스크톱 앱 있음. 데스톱앱의 안정성은 좀 떨어짐.
Box 10GB 윈도우, 맥, 리눅스, 안드로이드, 아이폰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사용. 파일 공유, 파일 관리, 파일 암호화 기능 등

개인적으로 네이버 서비스는 거의 쓰는 게 없어서 약간 망설여지긴 하는데, 그래도 가장 용량이 많은 네이버 MYBOX를 메인으로 몇 개의 저장소에 종류별로 파일들을 정리해야 겠다. 
 
그런데 이렇게 각기 다른 클라우드 저장소를 쓰면, 그들간에 파일 이동이 꽤 문제가 된다. 한 곳에서 한참 다운로드 받고, 다른 곳에 한참 업로드 해야 하니까. 아니면 동시에 한 폴더를 동기화(?) 하든가, 뭐 그런 비슷한 방법을 써야 한다. 그래서 다시 여러 클라우드 저장소 사이에 파일 복사, 이동을 조금은 더 쉽게 해주는 서비스들을 찾아보았다. 먼저 구글 검색을 해서 주로 어떤 서비스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그 서비스들 사이의 특징을 바드에게 비교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여러 개의 클라우드 스토리지 사이의 파일 이동 서비스 비교 (무료 플랜에 한해서)

서비스 지원/연동되는 클라우드 저장소 무료 저장공간전송속도
UnifiDrive Google Drive, Dropbox, OneDrive, Box, Amazon S3, FTP, SFTP, WebDAV 2 GB Up to 200 MB/s
CloudFuze Google Drive, Dropbox, OneDrive, Box, Amazon S3, Azure, FTP, SFTP, WebDAV, Google Photos, iCloud, Backblaze B2, Wasabi 5 GB Up to 100 MB/s
MultCloud Google Drive, Dropbox, OneDrive, Box, Amazon S3, Azure, FTP, SFTP, WebDAV, Google Photos, iCloud, Backblaze B2, Wasabi, MEGA, pCloud, HiDrive, Sync.com, Yandex Disk, pCloud Crypto, IceDrive, ADrive, Google Workspace, Zoho Docs, ShareFile, Egnyte, IDrive, SugarSync, Cubby, LiveDrive, SpiderOak, Barracuda 10 GB Up to 100 MB/s
Cbackup Google Drive, Dropbox, OneDrive, Box, Amazon S3, FTP, SFTP, WebDAV 1 GB Up to 100 MB/s
Cloudsfer Google Drive, Dropbox, OneDrive, Box, Amazon S3, FTP, SFTP, WebDAV 5 GB Up to 100 MB/s
cloudHQ Google Drive, Dropbox, OneDrive, Box, Amazon S3, FTP, SFTP, WebDAV, Google Photos, iCloud 2 GB Up to 100 MB/s
odrive Google Drive, Dropbox, OneDrive, Box, Amazon S3, FTP, SFTP, WebDAV 5 GB Up to 100 MB/s

사실 여기서 좀 더 자세하게 바드에게 질문해볼 수도 있는데, 각 서비스들의 세부 특징을 사이트 들어가서 좀 더 살펴본 결과, cloudHQ가 무료 클라우드 앱 사이에 데이터를 무제한 동기화 시켜준다는 점이 괜찮아 보였고, 사용법도 무난한 것 같아, 일단 낙점했다.
사실 소량의 비용을 지불하고, 구글 드라이브나 원드라이브 같은 서비스를 쓰면 크게 고민할 필요 없는 일인데, 무조건 무료 플랜으로만 비슷한 목적을 이루려다 보니 일이 좀 복잡해졌다. 그래도 무조건 비용을 줄여야 하니까...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도 조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2021-06-01

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신현호 저.

제목이 약간 도발적이다. 너희들은 감으로 이야기하지만 나는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것인가? 이 책을 집어든 것이 대략 1년 쯤 전이었던 것 같다. 한참 데이터 관련 책들을 모두 읽어보자고 작심하던 때였다. 박형준의 『빅데이터 빅마인드』, 스타벅스의 데이터 과학자 차현나가 쓴 『데이터 읽기의 기술』,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연세대 산업공학과 임춘성 교수가 쓴 『멋진 신세계』, 사회학자 하워드 베커가 쓴 『증거의 오류』, 한양대 경영대학 장석권 교수가 쓴 『데이터를 철학하다』 , 구글 데이터 과학자의 『모두 거짓말을 한다』 등을 보았다.

그 중에 증거의 오류와 데이터를 철학하다는 읽다가 너무 지루해서 집어던졌다. 가장 재미있게 본 두 권은 『모두 거짓말을 한다』와 『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였다. 전자는 구글의 검색 데이터만 가지고도 많은 사회 현상을 설명/예측할 수 있는 경제학자 출신 데이터 과학자의 통찰이 빛났었다. 후자의 책 역시, 경제학자 출신의 데이터 과학자가 데이터로 설명력을 높여주는 여러 가지 인간 집단의 특성과 사회적인 현상을 바라보는 틀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괜찮았고 인사이트를 주었던 책은 『빅데이터 빅마인드』, 데이터 과학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하게 알고 싶어 잔뜩 기대했지만 별로 기대에 차지 않았던 책은 『데이터 읽기의 기술』이었다.

경제학자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관심사들이 결국 심리학자들의 관심사와 얼마나 중첩되는지 엿보게 된 것 같다. 세상 일에 관심을 갖는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사회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데이터를 수집하고, 관찰한다. 그 데이터는 결국,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을 집합적으로 모은 것이고, 그 안에는 인간 행동의 원리, 심리학의 관찰과 실험 데이터가 들어있다. 마치 데이터라는 다리를 통해, 세상과 인간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도록 여러 학문들이 만난다고나 할까.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생각해보자.

로또 1등 당첨자가 나온 곳에서는 다음에도 당첨자가 또 나올까? 지금까지 슛을 많이 넣은 농구 선수는 다음 번에  슛을 성공할 확률이 더 높은 것일까? 투스트라이크 이후에 심판의 스트라이크 판정 확률은 낮아질까? 전염병 예방 백신을 맞고 부작용으로 사망할 확률보다 전염병으로 사망할 확률이 훨씬 높은데 왜 어떤 사람들은 백신을 안 맞으려고 할까? 유전무죄는 실제 법정에서 판결 결과로 나타날까? 딸을 가진 아빠들은 더 페미니스트 성향을 갖게 될까? 국회의원이나, 이사회에 여성 할당제를 실시하면 능력이 안 되는 여성들이 더 등용될까? 월드컵 기간에는 심장 마비로 인한 사망률이 더 높아질까? 1인1투표를 통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동등한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일까? 왜 백화점/인터넷 할인가는 9,900원과 같은 9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가? 잘 생긴 사람이 선거에서 뽑힐 가능성이 더 높을까? 정부 정책은 장기적으로 효과가 있을까? 담배세를 얼마나 올려야 국민 건강에 이득이 될까? 중년의 위기는 실존하는가?

이런 여러 가지 재미난 질문들에 대해서, 단순히 주장이나 당위가 아니라, 데이터를 증거로 답을 찾아간다. 그 데이터들은 때로는 통제된 실험실의 데이터이기도 하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 대한 응답 데이터이기도 하고, 시장이나 주가를 분석한 데이터이기도 하고, 오랜 기간 축적된, 또는 추적하거나, 관찰한 데이터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는 휴리스틱(heuristic, 발견법)이라는 간편하고 훌륭한 의사결정 기제가 있다. 그러나 휴리스틱은 종종 많은 편파와 오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증거와 데이터에 기반해서 세상을 이해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럴 때 세상의 다양한 데이터를 어떻게 바라보고, 수집하고, 끌어와야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읽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모범 사례들을 접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2021-05-22

기존 의학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우리 몸이 세계라면

우리 몸이 세계라면. 김승섭 글

고려대학교 김승섭 교수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은 SF작가 김초엽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보건학자이고 전공이 역학(epidemiology)라고 합니다. 역학이 무엇인지는 최근에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으로 인한 고통이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알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의학이 개인의 몸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공중보건학, 그 중에서 역학은 개인의 몸과 질병을 둘러싼 주변 환경을 좀 더 다각적으로 바라보는 학문인 것 같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여성들이 왜 오히려 스트레스 수준이 더 올라갔을까요? 적절한 실내 온도는 21도인가요? 이런 질문에서 시작하여, 상시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이 노출되는 건강의 위협, 혈액형과 인종이라는 가짜 과학이 어떻게 차별과 지배의 도구로 쓰였는지, 담배 회사에서 만든 연기 없는 세상(Smoke-Free World) 재단 이야기 등 정말 흥미롭지만, 아픈 의학과 과학의 역사가 나옵니다. 

오랫동안 사실이나 진실로 믿어졌고, 의심 받지 않았던 인간의 몸을 둘러싼 지식들이 어떻게 잘못 생산되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생산되지 않았는지 이야기합니다. 요즘 코로나19 백신의 지적 재산권 면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 책에서는 그에 앞서 왜 말라리아와 같이 많은 사망자가 나오는 질병에 대해 신약 개발이 적게 이루어졌는지 불편한 진실을 말합니다. 중세 서양 의학의 최고 권위자로서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도전 받지 않았던 갈레노스 해부학에 대해, 관찰과 데이터와 실험을 통해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은 당대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 질문하고, 눈으로 보이고, 쉽게 느껴지는 직관에 대해 의심하고, 새로운 데이터를 모으는 과정에서, 인류는 진보하였고, 과학은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과학을 통해 우리가 함부로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흑인, 여성, 동양인, 중국인을 구분지어 차별하고 낙인찍는 것이 사실은 근거가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체면역결핍 바이러스(HIV) 감염자들도 약을 꾸준히 먹어 체내 바이러스 농도를 일정 수준 미만으로 떨어뜨리면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HIV 감염인들의 자살은 같은 연령 비감염인보다 10배 이상 높다고 합니다. 질병에 대한 비과학적인 혐오와 낙인 때문입니다. 코로나19에 걸린 환자들에게도 혹시 치료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기 관리를 잘 못한 사람, 사이비 종교에 빠져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쉽게 낙인을 찍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 소수자가 됩니다. 토드 로즈 교수의 《평균의 종말》에서 이야기하였죠. 전투기 좌석을 설계하는 데에 "평균적인 체형"에 맞추면 아무도 맞지 않는 좌석이 나온다고.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든 이게 "정상"적이고, "평균"이며, "표준"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고 우리 몸은 여러 측면에서 다르고, 그것이 비난받고 차별받을 이유는 아닙니다.

2021-05-09

과학자가 쓴 과학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문학의 숲 222회 편지를 보고, 읽어보았습니다. 신뢰하는 사람들이 선택하거나 추천한 작품은, 선택을 후회할 가능성이 낮아서...

처음에는 장편 소설인 줄 알고, 첫 번째 작품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 이어 <스펙트럼>으로 들어가면서, 도대체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가 한참 고민했었습니다. 전자책으로 볼 때마다 느끼는 문제점이죠. 작품 전체가 잘 안 보이고, 지금 화면에 뜬 페이지의 텍스트가 전부로 보이는 것. 

SF 소설이 현실을 그린 소설과 달리, 현실적인 모순과 제약을 벗어나, 새로운 사고 실험을 할 수 있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가는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주 정복, 우주 전쟁과 같은 다분히 남성 취향일 것 같은 미래 과학 소설 속에 장애인, 비혼인, 동양인 여성, 사이보그와 같이, 주류가 아닐 것 같은 등장 인물들의 시각으로 미래 세상, 지구를 벗어난 우주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소설집이 제목으로 쓰인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나오는 냉동 수면 기술을 발전시킨 160세가 넘은 노인 과학자가 당연히 "남자"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따라갔는데, 그게 아니어서 당황했었습니다. 그만큼 아직도 전형적으로 과학, 공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긴 과학자라면, 그리고, 그 사람이 나이 많은 노인으로 나온다면, 당연히 흰 수염이 있는 할아버지일 것이라는 고착화된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과학 기술이 발전하여, 인간이 외계 행성에 갈 수 있고, 인간의 특성들이 "개량"되어 완벽에 가까워지고, 감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되고, 죽은 사람의 뇌를 시뮬레이션하여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될까요? 그런 세상에서 "완벽"하지 않은,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이 없어서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게 될까요? 김초엽의 흥미있는 우주 탐험, 뇌 탐험 작품들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2021-04-25

가짜 뉴스의 심리학

 

가짜 뉴스의 심리학: 결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 또한 믿기 쉬운 (박준석 지음)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서, 극단적인 진영간의 대립은 전례없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그런 진영의 대립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가짜 뉴스를 빼놓을 수 없다. 사람들은 왜 간단한 팩트 체크도 하지 않고, 가짜 뉴스에 빠져드는 것일까? 지능이나 지식이나 판단력이 부족해서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런 위험성은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이 책에서, 적나라하게, 심리학과 데이터 과학에 기반하여 보여준다.

가장 널리 알려진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은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에 부합하는 정보만 걸러서 처리하는 것인데, 소셜 미디어의 필터 버블(filter bubble) 현상을 통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그런 편향이 더 강해지는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그 외에도 인간이 지닌 여러 가지 한계가 언급된다. 인지적 자원을 쓰기 싫어하는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 성향, 다니엘 카네만이 말했던 시스템 1과 시스템 2 사고 경로, 기계 학습에서 말하는 과적합(overfitting)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음모론, 동기화된 논증(motivated reasoning), 단순 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 수면자 효과(sleeper effect), 거짓 진실 효과(illusory truth effect),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에 나오는 사전/기저 확률을 무시한 판단 등등등. 이제는 꽤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가장 점수가 높았다던 MIT 학생들도 100점 만점에 73점의 점수밖에 획득하지 못했다는 CRT 문제(cognitive reflection test)를 주위 친구들에게도 던져보고 싶다. 깊이있는 사고를 하지 않고, 소위 말하는 것 필링(gut feeling, 직감?)으로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지... 

책에서 나온 4·15 부정선거 음모론의 백미는 동기와 정서가 강력하게 작용하였을 때, 소위 말하는 전문가 또는 유사 전문가들도 가짜 뉴스 생산에 일조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선거에서의 지역별 득표율을 마치 주사위를 여러 번 던지는 독립 사건처럼 취급하여, 2의 424승분의 1의 확률로 발생 가능성이 극히 낮은 일이 발생했다는 물리학자의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다. 비슷한 논리의 부정 선거 음모론은 진보 진영에서도 일어났다. 지금까지 일어난 과거의 현상을 설명하는 모형을 만들 때에, 현실에 없는 전제를 너무 많이 깔고, 복잡하게 튜닝하는 것이 오히려 설명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미래에 발생하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비현실적인 전제에 기반한 음모론, 결국에는 가짜 뉴스가 될 수 있다는 것! 지식 수준이 높은 사람들도 이런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 

저자는 말미에 전문가에 대한 존중을 말한다. 미국에서 앤서니 파우치 국립 알레르기 전염병 연구소 소장이 코로나 음모론과 백신 음모론으로 어처구니 없는 공격을 받는 것을 생각하면 전문성 또는 전문가에 대한 신뢰도 중요한 것 같다. 그러나 전문가의 권위를 절대화하여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여 생기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도 있었다. 내 생각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1990년대 일인데, 손으로 책을 읽는다는 초능력 소녀에 적지 않은 과학자들이 속아넘어가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겠다고 달려들었던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고, 그것의 절정은 세브란스 병원 의사들이 그 소녀의 뇌파를 측정하면서 실제 책을 읽을 때의 뇌파와 동일하게 나온다며 놀라워하던 일이었다. 두 번째는, 황우석 사건이 발생했던 초기에,국보급 과학자였던 황우석에게 내가 감히 어떻게 도전하느냐며 그를 옹호하던 사람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국가적인 이익을 앞세워 황우석을 추종하는 경향이었다. 

누구나 가짜 뉴스에 속아넘어가고, 진영 논리와 편향, 오류에 빠질 수 있다. 나는 특히 사람에 대해 판단할 때 조심, 또 조심한다. 회사에서는 인사 평가라는 그럴듯한 제도를 핑계삼아 사람을 끊임없이 평가한다. 그런 평가는 인간의 모든 오류와 편파가 들어갈 구석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초기에 저평가했던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 보석같은 존재였던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최대한 유보한다. 특히나, 평가나 판단이 부정적인 것이라면. 그것이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일을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신뢰하거나, 전적으로 의심하는 양 극단을 조심하면서, 그 사람을 섣불리 좋은 사람, 또는 못 믿을 사람으로 낙인찍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 수록, 사람에 대한 판단의 영향력과 댓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와 검찰 개혁,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대립 속에서 동일한 사건과 사안에 대해 극단적으로 다른 시각이 충돌하였다. 나의 소셜 미디어 친구들은 나와 유사한 진영에 속해있고, 비슷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기존 진보 진영에서 이 사안을 계기로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양 극단의 시각이 첨예하게 싸우다보니, 쉽게 내 편과 네 편으로만 편가르기가 되고, 당신의 의견은 내 편이냐, 아니냐로만 단순화되는 것이 참 안타까웠던 것 같다. 

그래서 항상 진실 앞에 겸손해야 함을 느낀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틀릴 수 있고, 나도 인간의 편향과 오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으며, 새로운 사실 앞에 나의 믿음을 바꿀 수 있고, 진실은 아직 모른다는 겸손함을 유지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2021-04-10

고스트 인 러브

고스트 인 러브 책표지
고스트 인 러브 책표지

나는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지 못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90년 말에 개봉되어, 엄청난 흥행 실적을 낸 영화인데, 서울에 유학온 나는 대학 시절 '영화관'이란 걸 가보지 못했다. 서울에 와서 초기에 두 가지가 낯설었다. 하나는 지하철이라는 서울에만 있는 교통 수단! 다른 하나는 좌석 예약을 해야 한다는 영화관! 그런 저런 핑계와 그 당시 시대의 분위기 때문인지, 아무튼 영화라는 것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래도 라디오에서 하도 많이 나온 음악 언체인드 멜로디는 많이 들어봤던 것 같다.

프랑스의 대중 소설가 마르크 레비의 『고스트 인 러브』를 전자책으로 고르면서, 혹시 비슷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이 고스트가 되어서야 만나게 되는, 어쩌면 뻔하고 진부한 그런 이야기! 이렇게 짐작을 했지만, 그런 뻔한 사랑 이야기를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리고 영미권이나 미국, 캐나다가 아닌 유럽, 프랑스 작가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다를까 궁금하기도 했다.

주인공 토마는 피아니스트이다. 작품에서 몇 개의 피아노곡이 나온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너무나 유명한 곡이고, 슈베르트의 즉흥곡도 1번부터 4번까지 모두 언급된다. 빡빡한 연주 스케쥴에 묻혀 사는 피아니스트의 삶의 단편을 조금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연주자들이 실은, 밥먹는 시간 빼고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을 하는 모습은 전혀 나오지 않아서 좀 의아했다. 

주인공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죽은 아버지의 유령!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다루려나? 싶더니, 아버지의 엉뚱한 요구는 아버지가 못 다한 사랑(그것도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와의)을 살아있는 아들에게 이룰 수 있게 부탁하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 살고, 빡빡한 연주 스케쥴에 묻힌 피아니스트 아들은 아버지의 엉뚱한 부탁으로 며칠 내로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급박하면서도 리듬감있게 진행된다.

내가 재미있게 보았던 점은 바로 유럽식 대화이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대화, 어머니와 아들과의 대화, 그리고 주인공과 주변 사람들간의 대화이다. 전에 보았던 일본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대화 방식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장황하지만, 유머가 있고, 외교적인 것 같으면서도 직설적인 대화!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어서, 원래 원작자가 쓴 말의 뉘앙스를 온전히 느끼지는 못했겠지만, 번역이 매끄러워, 우리말 같으면서도 유럽식 리듬감과 정서가 느껴지는 대화를 엿보는 것이 참 즐거웠다. 

자식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가 사랑했던 그녀를 자식은 어떻게 보게 되는가?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그녀의 가족들은? 이런 미묘한 사람들간의 만남과 관계 맺음, 거기에서 오는 섬세한 감정들에 같이 동화되기도 하고, 안타까움과 환호를 같이 느끼기도 했다. 

책을 읽고 나서 마르크 레비에 대해 좀 더 알아보니, 아뿔싸! 작년엔가 읽었던 『그녀, 클로이』도 레비의 작품이었다. 뉴욕 맨하탄의 오래된 고급 아파트와 거기에 사는 다양한 캐릭터들과 주변 풍경이 살아 움직이듯 묘사가 되어 있어서 나는 당연히 미국 작가의 글이라고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