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에 하루 휴가를 냈습니다. 그동안 밀렸던 은행 일들을 끝내기 위해 시외 버스까지 타고 왔다갔다 하며 오늘 하루만 은행을 다섯 군데나 돌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일을 마치고 오산에 돌아왔는데 웬지 그냥 집에 들어가기엔 아까운 것 같아, 영화관에 들러 시간 되는 것으로 선택한 영화가 바로 헤어스프레이! 포스터를 보아하니 웬 촌스러운 여자가 전면에 웃고 있는 것이, 분명히 삼류 코메디일거라고 생각하고 들어갔습니다. 언제나처럼 오산의 영화관은 자리가 남아돌기 때문에 가장 보기 좋은 자리에 턱 하니 앉아서 느긋하게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드디어 짠~
"안녕, 볼티모어(Good morning, Baltimore)"라는 노래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게 가만히 듣고 있자니 상당히 기분 좋게 만들고, 귓가에 착 달라붙습니다. 음, 심상치 않은 영화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죠.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 통쾌, 상쾌한 춤과 음악들이 멈추질 않습니다. 주인공은 트레이시는 외모로는 볼품없는 뚱보 소녀이지만, 낙관적이고, 낭만적이고, 재능이 넘치며, 희망적인 미래에서 현재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벨 소리를 들을 수 있고(I can hear the bell), 불합리한 관행과 관습을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가이자, 탐험가이고, 혁신주의자입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복고적인 의상과 머리 모양, 그리고 춤과 노래, 사람들의 대화, 흑백 텔레비젼를 통해 현존하는 세계 최대 강국인 미국의 옛날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60's)"라는 재미있는 노래를 통해 그 때에 미국이 변화의 소용돌이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시각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 그 당시에는 불가능했었더군요. 흑인과 백인이 사랑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거니와, 흑인과 백인이 함께 TV에 나올 수도 없고, "검둥이의 날(negro day)"이 지정되어 그 때엔 흑인들만 따로 TV에 나오는 참 어처구니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합리한 것들은 평등한 세상이 미래이고 대세라는 믿음을 가진 주인공과 흑인들의 투쟁에 의해 바뀌어갑니다. 아마 몇 십년이 지나서 우리가 현재를 뒤돌아보면, 우리도 똑같은 생각을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가 되면 지금은 이단자나 몽상가로 찍히는 사람들이 미래에는 선구자(frontier)로 인식될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기대하지 않았던 수작이었습니다. 영화 보는 내내 재미있고, 유쾌하며, 영화 보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날아갑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로 만들어서인지, 노래가 참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노래가 영화를 지배하다보니 영화 속 대사, 메시지, 표현이 함축적이고, 비유적이며, 위트있고, 감동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어디서 노래 가사나 영화 대본을 구하고 싶어집니다. 아직 영화의 장면들이 따끈따끈한 상태일 때에 몇 개를 까먹기 전에 얼른 정리해보았습니다.
- 볼티모어 꽃게 아가씨(Miss Baltimore Crabs)
- 이것은 그냥 기억나는 재미있는 영어 표현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지역 특산물과 연계해서 무슨 지역 고추 아가씨 선발 대회가 있었던 것처럼, 미국에서는 볼티모어 꽃게 아가씨라는 표현을 쓰나보네요.
- 사랑이 없는 인생은 여름이 없는 계절이고, 드러머가 빠진 록큰롤이다 (Without love, life is the season without summer, rock 'n' roll without drummer.)
- 그 밖에도 사랑이 없는 삶이 뭐와 같다가 몇 개 더 있었는데, 이게 가장 기억에 남는군요.
- 체크 무늬를 만들자! (Do the checkerboard!)
- 이건 흑인 시위대가 피켓에 써놓은 메시지 중에 하나입니다. 백이 있으면 흑이 있어야 조화가 된다는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또 하나 재미있었던 표현은 "TV는 흑과 백이 다 있다 (TV is black and white)"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이렇게 안하고 "TV has colors!" 정도로 쓰지 않았을까요? ㅋㅋ
- 당신은 나의 영원한 사랑! (You are my timeless to me.)
- 주인공 트레이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 가운데 나오는 가사입니다. 영원하다는 표현에 참 가슴이 찡하게 만드는 노래였습니다.
- 이것이 미래다! (This is the future!)
- 흑인과 백인이 함께 어우러져 신나게 춤추는 것이 생방송으로 나가는 것을 멈추라고 말하는 방송국 매니저 벨마에게 쇼 호스트인 코니가 거절하며 내뱉은 짧은 한 마디!
- 빅 사이즈 전문 옷가게 (hefty shop?)
- 정확한 표현이 잘 기억나질 않는데, 아무튼 헤프티만 생각나네요. 그런 가게가 따로 있다는 것도 재미있고, 헤프티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온라인에서 온통 어거스트 러쉬가 화제이던데... 아직 못 봤습니다. 그러나, 헤어스프레이! 강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