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EBS 라디오를 틀어놓고 귀가 트이는 영어, 조오제의 토익 리스닝, 이보영의 포켓 잉글리시 등을 듣는다. 그러나 그렇게 듣는 것들은 모두 면도하면서, 샤워하면서, 옷 입으면서 흘려듣는 것들이므로 사실 건지는 것은 많지 않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그 많은 영어들 사이에 끼어있는 한국말들은 귀에 쏙쏙 잘 들어오는데 영어는 아주 집중하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복이 중요하다고 해서 주말에 재방송을 들어봐도 (그 때에도 딴 짓하면서 건성으로 듣는 편이라) 역시 한국말 해설은 두 번 반복하니 완전히 외우겠는데 외국어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오늘 해외에서 온 교육생들과 식사를 같이 하였다. 식사하는 도중에 CNN 뉴스가 나왔다. 나는 아주 주의집중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밥먹던 것을 잊고 들으면 겨우 몇 퍼센트 건질 수 있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밥 먹으면서 한 눈으로 힐끗힐끗 보고, 밥도 맛있게 먹으면서, 때로는 나와 잡담도 하면서 뉴스를 본 것 같던데 뉴스에서 방금 뭐라고 했냐고 물어보니까,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다.
예전에 회사에서 그 회사 사장님이 영어에 한이 맺힌 이야기를 종종 하셨다. 그러면서 자기는 나이도 아주 많지만 아직도 영어 테이프를 잠잘 때에 틀어놓고 잔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의식중에 뭔가 머리 속에 들어가지 않겠냐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아침에 샤워하면서 듣는 영어, 밤에 잠잘 때 틀어놓는 영어, 낮에 길거리에서 딴생각 잔뜩 하면서 듣는 영어, 극성스러운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영어에 질리게 만들도록 항상 틀어놓는 영어 TV 방송, 이런 것들이 영어 듣기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아침에 나오는 토익 방송 중에 간혹가다 문제는 건성으로 듣다가 답은 또렷이 들리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답은 알쏭달쏭한데 알고 보면 정말 쉬운 문제였다. 그런데 왜 들리지 않았을까? 그것은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지 않는 우리들에게는 주의 집중해서 영어를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제1언어에 비해 외국어를 이해하려면 훨씬 많은 자원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의를 주지 않고 흘려서 듣는 영어는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특히 언어 발달의 결정적 시기가 훨씬 지난 성인들에게 말이다. 심리학적으로 실험해봐야 할 재미있는 주제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거의 효과가 없거나 또는 부정적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아직 주의를 주지 않고 자동적으로 처리하기에는 너무나 먼 외국어 듣기 영역에서 주의를 주지 않고 흘려듣기 시작하면, 외국어는 일반 잡음, 배경 소리로 처리하는 기제가 점점 발달하지는 않을까?
외국에 살다 온 사람들이 영어를 잘 하는 이유는, 생활 속에서 대화를 하려면 (그것은 생존에 필요하므로) 자연스럽게 주의를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기회가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처음 운전을 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말을 시키거나 라디오를 틀어놓기만 해도 운전에 방해가 된다고 느끼며, 온 힘을 운전대에 집중해 꽉 쥐다보면 손에 땀이 나기도 하고 나중에 손바닥이 얼얼하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주의를 다 쏟아서 한 가지 과제를 반복하게 되면, 나중에는 점점 더 적은 주의를 쏟더라도 자동화되어 그 과제를 잘 할 수 있게 된다. 영어도 그런 것 같다. 그러니 주의를 쏟지 않고 그냥 틀어놓으면 잘 들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너무 순진한 희망 사항이 아닐까?
그래도 설마 부정적인 효과가 있겠어? 1%라도 뭔가 도움이 되겠지! 하면서 내일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할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