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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4

공간에 눈을 뜨다: 어디서 살 것인가(유현준 저)를 읽고

유현준 저. 어디서 살 것인가 책 표지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를 참 재미있게 보았다. 나는 심한 길치이고, 공간 감각도 둔해서 건축의 세계는 나와는 참 인연이 없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주요 장면들은 사실 공간과 얽혀 있는 것들이 많았다. 비가 오면 걸레로 물이 나가는 입구를 틀어막아 물놀이했던 한옥집의 마당, 따사한 햇볕과 함께 기억되는 한옥집의 마루, 동네 친구들과 자치기하고 구슬치기 하던 흙바닥 골목길, 초여름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산책했던 주택가, 그리고 서울의 자취집에 가는 정다운 숲길과 같이 공간에 대한 기억과 정서가 깊게 남아있다.

왜 그럴까? 그만큼 삶과 얽혀 있는 공간이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것인가? 이 책에서는 우리 주변의 공간과 도시, 인간의 삶, 과거의 역사, 미래, 기후, 기술의 발전, 사회와 정치 이야기를 버무려서 재미있게 풀어낸다.

처음에 학교 건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나라 학교 건물들은 영락없이 교도소와 비슷하고, 학교 운동장은 사실 군대의 연병장과 비슷하다는 저자의 지적에 아하 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학교는 획일화된 건물에서 똑같은 공부만 하거나, 아니면 흙먼지 날리는 연병장 같은 운동장에서 축구만 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학생들이 도란도란 모여서 이야기하고, 어울리고, 산책하고, 작은 놀이를 하려 해도, 지금의 학교 건물과 운동장은 오직 획일화된 교실 수업과 몇몇 남자들에게만 즐거운 축구 외에는 다른 것을 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나는 축구를 잘 못 했다. 아니 심하게 못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생일날에 친구들이 나를 즐겁게 해준다고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 하자고 했을 때 너무 싫었다. 군대에서도, 회사에서도 남자이니 어쩔 수 없이 축구를 해야 할 때가 가장 괴로웠고, 그런 전체주의적 상황이 폭력적이라고 느껴졌다.

점과 선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공적인 정주 공간(머무르는 공간)이 줄어든 요즘 아이들은 야외에서 시간을 보낼 일이 거의 없다. 낮은 천정의 아파트와 천정 높이가 정해진 학교를 벗어나면, 학원에 가기 위해 머리가 닿을 듯한 봉고차를 타고, 다시 천정으로 막힌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봉고차를 타고, 아파트에 와서 꽉막힌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로 들어가면 4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가 없다. 이런 변화하지 않는 실내에서의 시간들로 꽉 차 있는 상태에서 어떤 공간이 과연 의미있는 경험과 기억으로 남겠는가? 그들에게 변화하는 것이란 오로지 TV와 컴퓨터, 스마트폰 속의 화면 뿐이다. 그러니 변화하지 않는 답답한 여러 실내들(점)들의 단편적인 경험 속에서 신나고 재미있는 변화의 경험은 스크린 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

요즘에 아이를 데리고 어딘가를 가도 주로 실내 공간이다. 대형 쇼핑몰, 식당, 키즈 카페 등등등. 그런데 그런 곳에 가기까지는 자동차를 이용한다. 아이에게는 아파트 안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 가서, 꽉 막힌 차를 타고, 모든 것이 끊긴 채 갑자기 대형 쇼핑몰의 비슷비슷한 주차장으로 장면이 바뀐 것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조금씩만 다른 키즈 카페 실내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낸다. 요즘 아이들은 놀이터에 가기까지, 엄마, 아빠와 함께 걸어가며, 주변의 나무가 바뀌고, 풍경이 서서히 바뀌고, 다양한 모습의 상점들이 있고, 넓거나 좁은 길들이 있다가, 어디를 돌아, 어디를 지나 드디어 놀이터에 도착한다는 그런 연속적인 경험을 하기 어렵다. 단지 집, 차, 실내 키즈카페와 같은 불연속적인 공간들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도 차를 타고 어딘가를 가면 항상 무언가 아쉽다. 연속적인 경험이 끊기기 때문이다. 길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나는 정말 길을 좋아한다. 길을 걸으며 서서히 바뀌는 풍경과 그 길의 고유한 정서를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공간 감각이 둔한 것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의미있게 다가오는 공간이 별로 없어서 내가 공간에 대해 둔해진 것은 아닌지…

뉴욕에 갔을 때 인상적이었던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뉴욕과 같은 대도시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그러나 뉴욕에서 놀란 것은 서울처럼 넓은 대로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건물은 높은데, 8차선, 16차선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서울과 달리 뉴욕의 길은 2차선 길이 상당히 많았다. 한편으론 답답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2차선 길들을 따라 풍경이 참 많이 변했다. 길거리 음식이나 기념품을 파는 크고 작은 가게, 센트럴 파크, 뮤지컬 극장, 아리랑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 초상화를 그려주는 거리의 화가와 같이 8차선 대로에서는 시끄럽고, 바빠서 존재하기 어려운 그런 아기자기한 모습들이 펼쳐졌다. 그래서 비록 도심지의 거리이지만 거리의 모습과 연관되어 그 때의 경험들이 뇌리에 박혀있다.

건축물과 도시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건축과 도시는 다시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책의 저자는 화목한 세상을 꿈꾸며 건축을 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행복하도록 설계된 공간(작게는 주택에서부터 크게는 도시, 공원, 큰 집합 건물, 도로, 다리 등을 포함)의 중요성을 생각해보고, 나같이 둔한 사람에게도 공간을 바라보는 눈을 조금 더 뜨게 해 준 좋은 경험을 선물해준 책이었다.

덧붙이는 말: 요즘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함께 걸어 좋은 길”이라는 노래가 있다. 문구점을 지나서, 장난감집 지나서 학교 가는 길, 너랑 함께 가서 좋은 길… 과 같이 시작되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요즘 아이들이 과연 이런 길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할 거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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